본문 말씀에 담긴 이야기는 짧고 간단합니다. 율법교사가 예수께 묻습니다.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 예수께서 반문합니다. “율법에서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율법교사가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말하자, 예수께서는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면 살리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다시 묻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예수께서는 우리가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자비를 베푼 자가 이웃이라는 것이 이야기의 결론입니다. 율법교사는 종교의 핵심 주제인 영생의 문제를 끌어내 예수를 시험하려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반문하면서 그 율법교사 스스로 답을 내리게 합니다. 막연하게 들이대는 영생에 대한 질문을 구체적인 삶에서 적용되는 율법, 즉 ‘하나님과 이웃과 자신을 사랑하라는 삶의 원리’로 답하게 합니다.
예수께서 언급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당시 유대인들을 ‘확 깨우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의 종교와 가치를 대변하고 대표하는 인물들, 제사장, 레위인은 이웃이 되지 않았습니다. 순수 유대혈통을 지키지 못한 혼혈족, 그래서 같은 나라에 살면서도 경멸과 차별의 대상이었던 사마리아인이 이웃의 모델이 됩니다. 곤경 당한 자를 돕는 자, 영생을 얻는 자, 율법의 핵심을 실현한 자가 사마리아인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불쾌하고 황당한 이야기입니다. 그들의 관념과 통념을 깨버립니다. 그들의 오만과 편견에 던지는 도전입니다. 그들이 지닌 우월감과 안일한 사고를 뒤집는 파격입니다. “태생, 혈통, 신분은 주어진 삶의 조건일 뿐이다. 자비를 베푼 자가 이웃이다. 너희만의 하나님이 아니고 그가 누구이건 하나님은 자비를 베푼 자에게 손을 들어주신다. 천국의 길도, 영생의 길도 그런 삶에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듣기에 당연한 이야기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반전이고 파격인 셈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오늘 우리 사회에서 이 땅의 교회를 깨우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한국교회는 누구의 이웃입니까.
무자비한 자연과 생명 파괴의 현장에서, 가난한 서민들과 노동자들의 아픔과 죽음의 행렬에서, 생존권을 지키고자 하는 밀양 농민들의 고통에서, 세월호 가족들의 피눈물 나는 아픔에서, 교회는 지금 누구의 이웃입니까.
교세와 교권을 쥐고, 자랑과 허세에는 열심이면서 힘겨운 이웃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회피하는 종교, 핵심과 원칙은 알지만 편견과 오만에 젖어 자비는커녕 이권에 혈안이 된 종교, 이념적인 빗장 안에 갇혀 자신과 다른 이웃들의 차별과 소외에 앞장서는 종교, 어리석은 우월감과 독선으로 무자비를 정당화하는 종교, 그런 종교는 지나가는 제사장이고, 못 본 척하는 레위인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영생이라는 하나님의 축복이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과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과 관련되어 있다고 많은 이들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한국교회는 어떤 이웃입니까. 강도의 이웃입니까. 강도 만난 자의 이웃입니까. 이 시대에 ‘강도 만난 생명들’을 돌보고 치유하고 살리는 이웃이 되는 길, 그것이 우리가 믿고 확신하는 구원과 영생이 살아 있는 교회를 회복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노일경 목사(광주 한빛교회)
[오늘의 설교] 우리는 어떤 이웃인가
입력 2014-08-22 03: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