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읍교회-강릉교회] 대관령 넘은 십자가… 복음, 불길 처럼 번지다

입력 2014-08-23 03:33
일러스트= 정형기 jhk00105@hanmail.net
1930년대 강릉교회와 교인들(왼쪽). 1950년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교회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오른쪽).
강릉교회 신앙의 어머니로 불리는 이옥근 전도부인(왼쪽). 강릉읍성 임영관(오른쪽). 일제강점기인 1923년 강릉교회가 임영관 가까운 곳에 세워진다.
이상진 목사(왼쪽 두 번째)가 교역자들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
강릉교회
강원도 강릉 서부시장에 내렸다. 광복절을 하루 앞둔 지난 14일이었다. 이날 오전 서울을 출발한 고속버스는 빗길을 막힘없이 달려 3시간여 만에 강릉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시내버스로 환승해 강릉성결교회가 있는 서부시장 정류장까지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강릉읍성 임영관’ 등을 알리는 관광안내 표지판이 나타났다. 시계를 91년 전으로 돌려본다.

1923년 3월. 경성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 전신) 학생으로 구성된 지방전도대가 대관령을 넘어 영동지방의 관문인 강릉에 도착했다. 성결교 영동지방 모교회 강릉교회 시작을 알리는 첫걸음이었다. 강릉교회 주보는 이 무렵을 기점 삼아 교회 창립일을 3월 23일이라고 밝히고 있다.



지방전도대, 십자가 지고 대관령을 넘다

일제 강점기, 그 먼 강릉지방까지 어떻게 전도대가 복음여행을 떠났을까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한국성결교회 70년사’ 등에 따르면 당시 성서학원은 오늘과 같은 전문적 신학교육 위주가 아니라 실천적인 복음 전도였다고 전한다. 따라서 지방전도대 등을 통한 전도가 그 무렵 불길처럼 번졌다.

그 성서학원 14회 졸업생 26명 가운데 차진학이란 전도사가 있었다. 그는 그해 9월 서부시장 자리 박신동의 집을 기도처 삼아 강릉교회 첫 예배를 드렸다. 교자상 하나 놓고 드리는 한국 초대교회 예배 광경이었다. ‘조선야소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약사’(1929)에는 그 주소가 ‘강릉군 강릉면 용강정 28번지’라고 적혀 있다.

사실 강릉은 조선말까지만 하더라도 강릉도호부가 있는 강릉부였다. 하지만 1910년 일제 강점 시작과 함께 면 단위로 격하됐다. 행정치소 강릉읍성 역시 일제의 ‘조선역사 지우기’ 정책에 따라 읍성 내 행정관청과 성읍 민가가 속속 허물어지고 흩어졌다. 읍성 건축물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이 국보 제51호로 지정된 임영관 삼문이다. 읍성 내 호적 및 병무 행정을 집행하던 칠사당은 일본 수비대가 접수했다. 동헌 및 객사는 각기 면사무소 및 보통학교(초등학교) 등의 용도로 쓰이다 헐렸다.

강릉교회는 그 암울한 근대의 시작과 함께 임영관에서 100여m 떨어진 성읍 내에 기도처를 세웠다.

그런데 강릉 유생들은 차 전도사를 ‘차 선생’이라 부르며 은근히 경계했다. 유생 체면에 대놓고 야소쟁이라고 하지는 않았으나 ‘차 선생’이라는 호칭엔 묘한 반감이 담겼다. 유생들은 교회가 예배 처소를 구하지 못할 만큼 읍민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 차 전도사는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할 방도를 몰라 전전긍긍하던 사도 바울의 심정이 돼 애가 탔다. 하지만 성령께서 옷감장수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루디아 식구를 통해 복음을 열었듯 ‘용강정 28번지’ 집주인 박신동의 마음을 열었다.

그 뒤로 차 전도사와 여전도사 백신영은 교회 부지로 읍민이 소유를 꺼리는 성황당 터를 겨우 매입했다. 그 터는 금기 지역이다 보니 자연히 개똥밭이 되어 있었다. 그 자리엔 죽은 성황목이 있었다. 한데 인부들이 해를 입을까 ‘신목(神木)’을 제거하지 못했다. 신여성 백신영은 ‘예수의 이름으로!’ 성황목을 제거했다. 그러자 교인들이 인부를 대신해 회당 건축에 뛰어들었다. “무릇 하나님께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요일 5:4)라고 했는데 그들은 능치 못할 일이 없었다. 흙벽돌에 양철지붕을 한 66㎡(20평)의 작은 예배당이었다. 현 교회 건물 자리다.

1930년대 조선 민중은 의지할 곳이 없었다. 일제의 수탈은 기복신앙을 더 강화시켰고 기독교 복음을 발붙이지 못하게 했다. 이때 ‘강릉교회 신앙의 어머니’로 불리는 이가 나타나 회개 및 기도운동을 시작한다. 전도부인 이옥근(?∼1956)이다. 평북 신의주 출신인 그는 경성성서신학원을 졸업하고 30년 8월 강릉교회에 부임해 노방전도와 축호전도 등을 통해 교회를 성장시켰다.

“이옥근 전도사의 헌신은 전남 신안군 증도의 문준경(1891∼1950) 전도사의 순교 못지않습니다. 문 전도사가 이만신 김준곤 정태기 목사와 같은 후대들에게 신앙의 본이 된 반면 우리는 그렇게 드러내지 못한 점이 있어요. 앞으로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한’(빌 4:8) 이들에 대한 기림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이옥근 전도사님이나 차진학 목사님, 백신영 전도사님께 늘 빚진 마음이지요.”

강릉교회 이상진(53) 담임목사의 얘기다.

강릉교회는 두 여교역자들의 통성기도 등으로 급성장한다. ‘강릉교회에서는 1월 7일로 11일까지 김응조 목사의 인도로 부흥회를 열고…강릉에서는 유사 이래로 가장 큰 불길의 집회였는데…’(성결교 기관지 ‘활천’ 1934년 4월호)라고 할 만큼 30, 40년대에 복음의 꽃을 피웠다.



나라 잃은 백성에겐 신앙의 자유가 없다

그러나 나라 잃은 백성에게는 신앙의 자유도 허락되지 않았다. 일제는 민족의식을 고취한다며 구약을 폐기시켰고 어용 기독교단을 만들어 복음을 사문화했다. 특히 재림사상이 강한 성결교회는 아예 해산 대상이었다. 43년 12월 일제는 날조된 ‘성결교해산성명서’를 통해 사중복음의 재림론이 일제의 국체와 맞지 않는다 하여 성결교회에 ‘성경 수호자’라는 죄명을 씌웠다. 교역자와 직분자 등은 검속 대상이었다. 강릉교회 역시 이옥근 전도부인과 제직 10여명도 검속에 걸려 취조를 당했다.

이 교회 이부대 권사의 구술 자료.

“일경 셋이 ‘이 집이 강릉교인 집이 맞소’라고 하며 집에 들어오더니 성경과 찬송을 압수했다. 그리고 서에 끌려갔다. 그들은 ‘이 전도사가 예수 재림과 심판에 대해 설교했는가, 천황을 욕하지 않았는가’하고 다그쳤다. 평신도였던 나는 풀려났지만 다른 사람들은 수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결국 강릉교회를 비롯한 성결교단 교회는 1945년 11월 9일 서울 경성신학교에서 재흥총회가 있기까지 폐쇄됐다.

이상진 목사가 말을 이었다.

“교회가 회복된 후 이옥근 전도사님은 한국의 위대한 설교자 이성봉 목사를 초청, 사경회를 개최했어요. 신학교 1년 후배였죠. 그때 몰려든 인파로 사경회 장소가 마땅치 않자 용강동 정미소와 잠실(蠶室)을 빌려 눈물의 사경회를 계속했습니다.”

한데 강릉교회의 고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6·25 발발과 함께 또 한번 교회가 폐쇄된다. 임수열 전도사와 이옥근 전도부인도 피란을 가야 했다. 그리고 추석 무렵, 숨어 지내던 임수열 전도사가 수요기도회를 이끌기 위해 교회 관사로 들어왔다가 공산당원에게 체포돼 강릉지역 다른 교회 인사들과 함께 순교한다.

이렇듯 강릉교회는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고난을 이겨나갔다. 이 피로써 세워진 강릉교회는 오늘의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한국교회사의 한 장면이기도 하다.

강릉=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