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는 대입수학능력시험 단골 출제 시(詩)다. 1975년 등단 이후 고유의 리얼리즘 세계를 구축해온 하종오(60) 시인의 작품이다. 그가 28번째 시집 ‘초저녁’(도서출판b)을 펴냈다. 자연인의 나이로는 이순을 넘기고 시력(詩歷)으로는 불혹에 이르러 나온 시집이다.
지난해 해가 지는 서쪽 섬 강화도로 이사 간 후에는 문단 사람이나 기자들을 거의 만나지 않는다는 그를 20일 서울 마포구 양화로 한 카페에서 만났다.
“작은 출판사에서 낸 책을 알아봐줘서 고맙다”고 운을 뗀 그는 “거대 출판사는 다 자본화된 출판사들이다. 말로는 비자본주의를 외치는 시인들이 막상 시집은 자본주의 회사에 내려고 하는데 그것부터 반성해야 한다”고 일갈했다. 이미 이름이 충분히 알려진 시인조차 지방출판사나 작은 출판사를 외면하는 현실이 안타깝다는 것이다. 이번에 책을 낸 출판사는 조기조 시인이 운영하는 곳인데 그는 앞으로 주로 여기서 낼 것이라고 했다. 시집 해설을 정식 평론가가 아닌 석사과정 중인 ‘예비평론가’ 홍승진씨가 쓴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신념은 그가 이 시집에서 가장 아끼는 시 ‘반성’에도 드러난다. ‘시인이 자본주의자가 된다는 건/ 시인이기를 포기하는 욕망일 것이다.’
시집 제목대로 그의 인생은 이제 초저녁이다. 그는 “이제야 세상이 잘 보인다.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게 이 나이가 되니까 되더라”며 웃었다.
이번 시집에는 시인이 그동안 걸어온 길과 시세계가 압축적으로 담겨 있다. 그는 “40년간 써온 시를 정리하자면 서정시와 리얼리즘 두 갈래다. 이 시집에는 강화도 농촌과 도시 변두리의 서정을 담은 시, 그리고 탈분단·다문화 문제를 다룬 리얼리즘 시를 모았다. 한번 매듭을 짓자는 뜻”이라고 전했다.
시집은 모두 5부로 구성돼 있다. 1부는 ‘초가을 초저녁’ ‘초겨울 초저녁’ 등의 연작에서 보듯 풍경과 가족을 재구성한 서정시다. 2부는 자신의 시쓰기와 시인의 역할에 대한 반성, 3부는 민족과 국가를 넘나드는 인간 문제, 4부는 우리 삶에 대한 사유, 5부는 산문체 시들이 담겨있다.
그는 “오랫동안 지내온 서울 변두리 골목을 뒤로하고 강화도에 자발적으로 유폐된 후에는 논둑밭둑을 바라보며 이 시들을 썼다”고 털어놓았다. ‘산과 나무와 사람이/ 서로 골고루 친하고 싶어도/ 아무 관계가 성사되지 않아 편안하다’(‘초여름 초저녁’ 중)처럼 그는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하려하지 않아도 좋은 단계에 이른 듯 보였다.
시인은 서문에 이렇게 썼다. ‘내가 가진 것은 시밖에 없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랐던 저 청년 시절부터 내가 이웃들보다 더 가진 것이 있다면 시뿐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지금까지 나는 줄곧 시만 써왔다.’ 그래서 일까. 그는 ‘다작(多作)’ 시인이다.
그는 “요즘 어디를 가나 사람이 많고 시끄럽다. 말과 이야기도 굉장히 많다. 그러니 많이 써야한다. 이걸 안 쓴다면 시인이 아니다. 시인이 다작할 수밖에 없는 이 시대를 반성한다”고 말했다.
한승주 기자 sjhan@kmib.co.kr
“내가 이웃보다 더 많이 가진 게 오직 시뿐이길…”
입력 2014-08-22 03: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