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충청도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 내포(內浦)라고 했다. 내포는 바다나 호수가 육지 안으로 휘어 들어간 지형을 뜻한다. 서해 물줄기가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온 충남 서북부의 홍성을 비롯해 예산 당진 서산 보령 등 충청도의 ‘곳간’으로 불리는 열 고을 중 조선시대에 홍주목이 있었던 홍성이 내포의 중심지역이다.
홍성은 교과서에 소개될 정도로 위대한 인물이 많이 탄생한 지역이기도 하다. 사육신으로 유명한 성삼문과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로 널리 알려진 고려 장군 최영이 홍성 출신이다.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투사 김좌진 장군도 이곳에서 태어났고, ‘님의 침묵’으로 유명한 만해 한용운도 홍성이 고향이다. 이쯤 되면 홍성에서 함부로 인물 자랑하지 말라는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대하와 새조개로 유명한 남당항과 일몰이 아름다운 궁리포구, 그리고 토굴새우젓으로 이름난 광천 때문에 덜 알려졌지만 조선시대 홍주목 관아가 있었던 홍주성의 홍성군청은 옛 관아와 현 관청이 공존하는 전국 유일의 역사 현장이다. 일제 강점기 때 일제가 현 건물을 지으면서 대부분의 건물을 훼손해 지금은 810m 이르는 남쪽 성벽과 조양문, 홍주아문, 안회당, 여하정만 남아 있지만 보존 상태가 좋아 휴식처 및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다.
여느 관청과 달리 홍성군청은 솟을대문을 닮은 홍주아문(洪州衙門)이 정문이다. 홍주아문은 홍주목사 집무실인 안회당의 외삼문으로 ‘아문’은 관청을 이르는 말. 홍주아문을 들어서면 수령 700년에 가까운 거대한 느티나무 두 그루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오관리 느티나무로 불리는 이 나무는 임진왜란을 비롯해 이몽학의 난, 동학농민전쟁, 천주교 박해, 그리고 한국전쟁 등 홍주성에서 일어난 참상을 지켜본 산증인으로 고을에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밤새 울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청사를 가릴 정도로 거대한 이 느티나무에 어느 해 원앙 한 쌍이 날아들어 새끼를 낳았다. 군청 직원들은 이 원앙 새끼를 후정의 여하정 연못으로 옮겼고, 다섯 마리로 늘어난 원앙 가족은 연꽃이 활짝 핀 연못을 보금자리 삼아 유영을 즐기고 있다. 여하정은 목사(牧使)가 휴식을 취하던 육각형 정자로 거대한 버드나무 고목과 어우러져 더욱 예스럽다.
여하정과 청사 사이의 후정에는 웅장한 한옥 한 채가 문을 활짝 열어젖힌 채 방문객을 맞고 있다. 22칸짜리 한옥은 안회당으로 불리는 홍주목의 동헌으로 홍주목사가 집무를 하던 곳이다. 안회당(安懷堂)은 흥선대원군이 직접 하사한 이름으로 논어의 ‘노자안지(老者安之) 붕우신지(朋友信之) 소자회지(少者懷之)’라는 문구에서 따왔다. ‘노인을 평안하게 모시고 벗은 믿음으로 대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뜻으로 선정을 베풀라는 의미이다.
1960년대까지 활용되던 안회당은 이후 창고로 전락하면서 사람의 온기가 사라졌다. 문화재로 지정된 덕분에 건물이 상하면 이따금 보수만 했을 뿐 먼지는 점점 쌓여갔다. 안회당에 다시 사람의 발길이 닿기 시작한 것은 문화재청의 ‘생생문화재 활용사업’에 선정되면서부터. 지난 4월 굳게 닫혔던 빗장을 열고 먼지를 걷어낸 후 주민이나 관광객을 위해 무료로 연잎차를 제공하면서 지역 명소로 거듭났다.
홍성의 랜드마크는 홍주성의 동문인 조양문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인들에 의해 서문 남문 북문을 비롯해 성벽 대부분이 파괴됐지만 주민들의 반대로 조양문만 살아남았다. 홍성 시내에 우뚝 솟은 조양문은 서울 숭례문의 축소판으로 경관조명이 불을 밝히는 한밤에 더욱 황홀하다.
홍성이 낳은 수많은 인물 중 으뜸은 백야 김좌진 장군이다. 한국 독립투쟁사에서 최고의 전과로 기록된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좌진 장군의 생가는 무궁화 꽃이 활짝 핀 갈산면에 위치하고 있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김좌진 장군은 15세 때 노비문서를 불사른 후 노비들에게 전답을 나눠줬다고 한다. 17세 때는 갈산중고등학교 자리에 호명학교를 세워 신학문을 교육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으로 지역민들로부터 지금도 존경을 받고 있다.
천수만방조제와 인접한 궁리포구에서 속동전망대를 거쳐 남당항에 이르는 약 7㎞ 해안도로는 드라이브 명소이자 서해안을 대표하는 별미가도이다. 새조개를 비롯해 꽃게, 주꾸미, 갑오징어, 붕장어, 대하, 전어 등이 호수처럼 잔잔한 천수만에서 철따라 올라와 별미를 즐기려는 미식가들로 사철 북적인다.
별미가도의 출발점인 궁리포구는 드넓은 천수만과 A·B방조제, 간월도를 비롯해 수평선을 수놓은 안면도가 그림처럼 펼쳐지는 곳이다. 만선의 고깃배가 수시로 들락거리고, 물이 빠지면 드넓은 갯벌은 조개를 캐는 체험객들로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포구의 음식점들은 갓 잡은 싱싱한 해산물을 맛볼 수 있는 곳으로 가격도 저렴한 편이다.
영화 ‘피끓는 청춘’의 촬영현장이기도 한 속동전망대는 모섬으로 불리는 작은 섬과 천수만이 한눈에 들어오는 명소이다. 전망대에서 나무계단을 따라 모섬에 오르면 영화 ‘타이타닉’의 한 장면을 연상하게 하는 배 모양의 포토존이 눈길을 끈다. 갯내음과 솔향 그윽한 포토존에서 내려다보는 천수만의 낙조는 한 폭의 유화나 마찬가지. 하루 종일 천수만에서 노닐던 태양이 해무로 희미한 안면도에 걸리면 깨진 거울 파편처럼 거친 질감의 갯벌이 노을을 품는다.
홍성의 노을은 자연산 대하가 갓 출하되기 시작한 남당항의 음식점에서 무르익는다. 하얀 소금을 두텁게 깐 프라이팬에 펄떡이는 대하를 넣으면 구수한 냄새와 함께 노릇노릇 익어가는 대하의 껍질이 천수만의 노을색을 닮아간다.
홍성=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
홍주성서 ‘교과서 속 역사인물’ 만난다
입력 2014-08-21 03: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