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명량'이 관객 1398만으로 역대 흥행 1위 '아바타'(1362만명) 기록을 경신한 16일. 서울 광화문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시복미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100만 가까운 인파가 몰려든 이곳에서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행사를 주시했다. "충(忠)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는 영화 속 대사와 낮은 자를 위해 무릎 꿇은 교황의 기도가 일맥상통한다는 점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장군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영화는 어떻게 봤는지, 무엇이 관객들로 하여금 이토록 열렬한 호응을 하게 하는지, 명량대첩 당시 실제 상황과 영화는 얼마나 다른지, 뿌듯한 장면은 무엇이고 아쉬운 대목은 없었는지 등등. 장군은 때로는 진지한 모습으로, 때로는 웃는 표정으로 응했다. 그의 답변은 '난중일기' 등 기록에서 본 언행 그대로였다.
-개봉 18일 만에 ‘아바타’를 누르고 흥행 1위에 올랐는데 소감이 어떻습니까.
“이렇게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너무 기쁜 일이오. 영웅적인 리더십을 거론하지만 모두가 백성들 덕분이지요. 하지만 자주 이기게 되면 반드시 교만해지기 쉽다는 말을 해주고 싶소. 연승으로 인한 자신감이 자만심으로 흐르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장수들에게 항상 조심하라고 강조했지 않았소.”
-주인공 최민식의 연기는 어땠습니까.
“서애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나에 대해 ‘말과 웃음이 적고 얼굴은 단아해 마치 선비 같았으나 안으로는 담대한 기운이 있었다’고 했지요. 내 조카 이분은 ‘말 타고 활쏘기에 아무도 따를 자가 없었다’고 묘사했고. 심기가 굳으면서도 영웅의 풍모를 지닌 이순신을 연기한 최민식이 나와 많이 닮은 구석이 있더군. 이거 내 자랑인가? 허허.”
-영화의 완성도가 떨어지지만 세월호 참사와 애국심 마케팅 때문에 흥행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다 맞는 얘기라고 생각하오. 1597년 진도 앞바다와 2014년 진도 앞바다가 417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조우했지요. 1597년의 진도가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군을 물리친 승리의 바다라면, 2014년의 진도는 아픔과 슬픔의 바다라오. 완성도는 다소 부족하더라도 세월호 참사로 멍든 국민들 가슴에 위로가 됐다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오.”
-어떤 장면이 가장 감명 깊었습니까.
“명량대첩을 앞두고 전투력의 열세를 정신력으로 극복하기 위해 연설을 했다오.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고.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1000명도 두렵게 한다며 독려도 했지요. 하지만 전쟁이라는 게 마음먹은 대로 되지는 않소. 그래서 회오리에 떠내려가는 대장선을 백성들이 구해내는 장면에서 울컥 할 수밖에. 백성의 힘은 역시 강하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했지요.”
-아군과 적군이 떼거리로 싸우는 백병전과 배끼리 충돌하는 충파는 허구라던데요?
“진짜냐 가짜냐가 중요하지 않다고 보오. 해적을 막는 데는 수군만한 것이 없으니 수군을 폐지할 수는 없다고 임금에게 직접 아뢰었지 않소. 백병전과 충파는 수군이 육군 못지않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상징적인 장치가 아닐까 싶소이다만.”
-왜장 역을 맡은 류승룡과 칼싸움을 하는 장면도 사실과 다르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1594년 4월, 한산도에서 장검을 주문하면서 칼날에 문구를 새긴 적이 있소. ‘석자 되는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강이 떨고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는 글이지요. 김한민 감독이 ‘최종병기 활’에서 활에 중점을 두었다면 ‘명량’에서는 이순신의 검을 보여주자는 의도가 아닐까 생각하오만…. 제 허리춤에 칼이 있잖소.”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한 뒤 백의종군할 때 억울하지는 않았나요.
“장부가 세상에 나서 나라에 쓰이면 목숨을 다해 충성을 바칠 것이요, 만일 나라에 쓰이지 않으면 물러가 농사짓고 공부하면 되는 것이지요. 아직 나에게는 전선 12척에 군사 120명이 남아있으니 싸우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소.”
-실제 위기상황에서 부하들에게 주문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1592년 5월 7일, 임진왜란 중 첫 출전한 옥포해전을 앞두고 수군과 육군이 모두 패했다는 소식을 접했다오. 긴장하고 당황한 군사들에게 공포심과 경험부족을 극복하고 여유와 냉철함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게 급선무였지. 그래서 ‘가벼이 움직이지 말라. 침착하게 태산같이 무겁게 행동하라’고 했다오.”
-해상전투 등 많은 장면을 컴퓨터그래픽(CG)으로 구현했는데 실감이 나던가요?
“실제 배는 8척이고 나머지 300여척은 CG라는 얘기를 나도 들었다오. 왜군 배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장면에서는 조금 티가 났지만 전체적으로 괜찮았소. 어떤 장면이 실제이고 CG인지 헷갈리더라고. CG 기술이 명량대첩 때도 있었다면 가상의 거북선을 만들어 서에 번쩍, 동에 번쩍 하면서 왜군들을 혼비백산케 하는 건데.”
-영화 흥행의 일등공신을 꼽는다면?
“나만의 논공행상이 있다오. ‘전공(戰功)을 탐하지 말라. 적을 쏘아 죽인 뒤 비록 목을 베지 못하더라도 논공을 할 때에는 힘껏 싸운 자를 으뜸으로 할 것’이라는 거요.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도 중요하지요. 열심히 작업한 모든 제작진이 일등공신이 아니겠소.”
-가장 가슴 아팠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1597년 4월 19일, 나라에 충성을 바치려 했건만 죄에 이미 이르렀고 어버이에게 효도하려 했건만 어버이마저 돌아가셨을 때였소. 명량대첩에서 승리한 지 얼마 후 막내아들 면의 부고를 받았을 때는 코피를 한 되 남짓이나 흘렸다오. 슬픔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리오.”
“부인 외에 혹시 마음에 둔 여자는 없었느냐”는 짓궂은 질문에 장군은 단호하게 답했다. “이건 비밀인데 갓 벼슬을 할 때 병조판서가 딸을 나에게 시집보내려 한 적이 있소. 그때 ‘어찌 권세 있는 집에 발을 디뎌 놓고 출세하기를 도모하겠느냐’며 중매인을 돌려보냈소. 영화에서도 내 주변에 여자는 한 명도 나오지 않지 않소. 허! 참.”
명량대첩에 이어 한산대첩과 노량대첩을 다룬 3부작이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아느냐고 물었다. 장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한산에서는 거북선과 학익진의 위용을, 노량에서는 원수들을 섬멸할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결의를 보게 될 거요. 1598년 11월 19일, 갑자기 날아든 총탄에 맞고는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유언은 장렬한 명대사가 될 것이고.”
장군은 딸의 이름을 지어달라는 한 부하에게 여해(如海·바다와 같음)로 하라고 했다. 자신도 평생 동안 늘 바다처럼 살았다면서. “나는 바다에 수많은 부하와 백성을 묻었소. 누구 하나 아깝지 않은 목숨이 없었지요. 내 목숨과 바꾸어서라도 그들을 살릴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소이다.” 충무공은 오늘도 변함없이 광화문을 지키고 있지만 마음은 바다에 가 있었다.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
‘명량’ 흥행 1위 맞이 이순신 장군 가상 인터뷰 “멍든 백성 가슴에 위로가 되어 참으로 다행한 일이오”
입력 2014-08-20 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