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동안 한 동네에서 어려운 이웃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는 약사가 있다. 남들은 건물을 새로 짓거나 더 좋은 동네로 옮겨갔지만 그는 여전히 빛바랜 약사 가운을 입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자정이 한 참 넘도록, 동이 훤하게 틀 때까지 심야응급약국 간판에 불을 켜고 언제 찾아올지 모를 이웃의 발길을 기다린다.
주인공은 경기도 부천 소사구 경인로 홈플러스 주차장 입구 바로 옆에 있는 바른손 약국 주인 김유곤(54·분당우리교회 집사) 약사다. 약국은 24시간 운영된다.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이나 혜택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김 약사는 약국 한 구석 쪽방에서 4년째 새우잠을 자며 시민들의 건강을 보살피고 있다.
처음엔 막연한 의무감에서 한 일이다. 2010년 7월 시에서 지역별로 심야약국 지원자를 받았으나 아무도 지원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김 약사가 나선 게 시초가 됐다. 그해 말 시범운영 기간이 끝났지만 김 약사는 심야약국 간판을 내리지 않고 시민들과의 약속을 지켰다.
김 약사는 육체적으로 힘들고 적자를 보고 있지만 밤늦은 시간이나 새벽에 약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된 후로는 심야약국을 그만둘 수 없었다고 했다. “약사는 환자를 위해서 봉사하는 직업으로 나에겐 천직입니다. 오늘이 내 인생에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약국을 지키고 있습니다.”
김 약사가 이웃을 돕기 시작한 것은 1992년 약국을 개업하면서부터다. 97년 외환위기(IMF) 때는 헌옷을 모아 노숙자들에게 나눠주는 활동을 했다. 매년 추석과 설 명절에 주변의 어려운 이웃에게 라면과 생필품을 전달하고 있다. 또 북한동포 선교를 위해 매달 50만원의 선교비도 보낸다. 3년 전부터는 유자농가의 농산물을 판매해줘 농가의 소득을 올리는데 한몫을 거들고 있다. 거기서 나온 수익금으로 어려운 농촌을 돕고 중·고생 3명에게 장학금도 준다. 또한 어려운 교회 돕기 성금으로 매달 30만원을 전달한다.
속상할 때도 가끔은 있다. 지인들로부터 ‘돈을 얼마나 벌려고 그렇게 악착같이 일하냐’고 오해를 받을 때가 가장 힘들다고 했다. 김 약사가 이제껏 따로 모아 둔 재산은 거의 없다. 다만 그의 힘으로 세워진 필리핀에 있는 선교센터와 교회 2곳, 의료시설 등 국내·외 곳곳에 수많은 흔적이 있지만 모두 그의 소유가 아니다.
김 약사가 올 들어 확 바꾼 것이 있다. 머리 좌우측 머리카락을 밀고, 가운데 머리카락만 강조한 ‘강호동식 헤어스타일’을 선택했다. 다리를 쭉 뻗고 누울 수 없는 공간에서 쪽 잠을 자고 일어나려면 머리카락이 늘 헝클어져서 늘 고민거리였다. 그렇다고 승려처럼 깎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고민하던 중 유럽 축구선수들처럼 양쪽 머리카락을 싹 밀어버리면 좋을 것 같았다.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다. 약국을 찾는 이들도 김 약사의 대변신에 박수를 보낸다.
바른손약국 손님 중에는 여호와의증인 등 이단을 믿는 사람들도 적잖았다. 그들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스스럼없이 드나들면서 버젓이 포교활동을 하기도 했다. 약국 간판 왼쪽엔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잠 16:3)는 성경구절이 캄캄한 밤을 지킨다. 그 오른쪽의 빛나는 “기독교는 생명입니다. 생명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라는 간판 과 약품 진열대에 걸린 십자가도 김 약사의 든든한 보디가드다.
김 약사는 17일 주일 오전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약국 문을 잠시 닫았다. 오래된 엑센트 자동차에 시동을 걸면서 ‘별세(別世)신학’을 얘기했다. “별세에는 눈물이 없고 슬픔이 없으며, 즐거움만 있습니다. 천국은 죽은 후에 가는 영혼의 천국만이 아니지요. 지금 현세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면 그게 별세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오늘이 마지막 날’ 이라는 생각으로 필사적으로 약국을 지킨다. 새벽이 와도 그를 찾는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바른손약국은 잠들지 않는 작은 천국이었다.
부천=글·사진 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미션&피플] 24시간 주민 건강 지키고 나눔 실천, 김유곤 약사
입력 2014-08-18 03:14 수정 2014-08-16 1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