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남혁상] 통일논의 앞서 남북관계 개선부터

입력 2014-08-18 03:06

남북 하천·산림 공동관리, 문화유산 공동 발굴·보존, 제70주년 광복절 문화사업 공동 추진….

박근혜 대통령이 8·15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북한에 새롭게 제안한 것들이다. 대통령 기념사에서 천명한 제안치고는 지극히 낮은 수준이다. 어떤 이들은 대북 제안 내용이 예상 밖이었다고 했고, 또 다른 이는 현 상황을 감안한 내용이라고도 했다. 박 대통령의 이런 제안들은 현재 풀리지 않는 매듭처럼 꼬인 남북 관계를 어떤 식으로든 물꼬를 터보자는 취지에서 제시됐다. 작은 협력 사안부터 남북 교류를 시작해 한반도에서 새로운 건설적 대화의 계기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비무장지대(DMZ) 세계평화공원’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등 굵직한 제안들이 쏟아진 지난해와 비교하면 올해 제안은 내용만 보면 오히려 작년보다 후퇴한 측면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이는 좀처럼 돌파구를 열지 못하고 있는 현 상황이 대폭 감안된 것이라고 한다. 이미 얼마 전 정부가 이산가족 상봉 등을 위한 남북 고위급 접촉을 제안했던 만큼 이번엔 다른 접근법이 필요했을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박 대통령의 이번 제안은 사실 고육지책 성격이 강하다. 눈에 띄는 제안들이 없었던 것은 관계 개선의 본질적 문제를 의도적으로 피하려 했기 때문이다. 현 시점에서 남북관계 구도를 바꾸기 위한 아이템은 대규모 경제협력이거나 금강산관광 등이다. 여기에 우리 정부의 고민이 있다. 이를 제안하거나 수용하려면 대북 5·24조치 해제 문제가 걸림돌이 된다. 획기적인 제안을 하려면 이 틀을 깨야 하는데, 정부는 우리가 먼저 나설 명분이 없다고 한다. 그러자니 좋게 말해 ‘미시적 제안’들이 거론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제안들이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거대담론이 있다면 미시적 접근도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문제는 북한의 변화만 요구한다는 데 있다. 북한에 대해 무엇을 제안하고, 또 어떻게 변해야 한다는 당위론적 제안만 있는 셈이다. 우리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어떻게 노력하고 변화하겠다는 모습은 경축사에 담기지 않았다.

얼음장처럼 냉랭한 남북관계와 달리 우리 쪽에선 정부 주도의 통일 논의가 한창이다. 박 대통령은 올해 초부터 통일대박론, 드레스덴 구상, 통일준비위원회 출범 등 적극적인 ‘통일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앞으로 국내적으로 커다란 정치적 이슈가 급부상하지 않는 이상 정부가 나서서 몰아치는 듯한 통일 논의는 계속될 듯하다.

하지만 이런 논의가 현재 얼마나 많은 국민적 공감을 얻고 있는지는 다시 살펴봐야 한다. 메아리 없는 외침은 공허하다는 말처럼 ‘반쪽 논의’는 말의 성찬으로만 끝날 수도 있다.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최소한의 인도적 문제도 제대로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나를 따르라’ 식의 통일 논의만 앞서가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볼 필요도 있다.

남북은 일단 만나야 한다. 관계 개선이 급선무다. 그러려면 우리 정부 역시 조금이라도 변해야 한다. 조금씩이라도 정책 변화의 모습을 보일 때 북한 반응을 기대할 수 있다. 서로 조금씩 양보하는 제스처를 취해야 대화의 물꼬가 터질 수 있다. 대화의 주도권을 잡는 것은 그 후라도 그리 늦진 않다. 남북 관계 개선의 기회는 다행히 멀지 않다. 남북 고위급 접촉의 길은 조금이나마 열려 있고, 다음달 인천 아시안게임도 예정돼 있다. 다행히 이번 고위급 접촉 의제는 ‘쌍방 관심사항’이다. 논의 의제가 열려 있다는 의미다. 한꺼번에 큰 틀의 정책 전환은 쉽지 않겠지만 우리 역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성의가 필요하다.

남혁상 정치부 차장 hs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