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래 칼럼] 메시아는 아직 다시 오지 않았다

입력 2014-08-18 03:23

시대가 악할수록 처지가 고통스러울수록 사람들은 ‘한 방’을 기대한다. 2000년 전 이스라엘 사람들도 구세주 메시아를 갈망하고 기다렸던 것처럼. 그가 등장함으로써 단숨에 사태가 반전되고 모든 난제가 해결될 수 있으리란 소망이 그만큼 절실했던 것이다.

4박5일의 방한일정을 마치고 오늘 돌아가는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쏟아졌던 뜨거운 관심도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군(群)과 무관하지 않다. 실제로 교황은 세월호 유가족과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나 위로하고 남북분단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며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를 촉구했다. 그의 발언과 행보는 매우 감동적이었다. 하지만 극적인 반전은 일어나지 않았고 사실 그렇게 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메시아로서가 아니라 로마가톨릭교회의 수장으로서 온 교황에게 기대어 한국 사회의 문제 해결을 바라는 것은 우리의 책임 회피일 뿐이다. 교황이 우리 사회를 향해 지극히 보편적이고 인류애적인 가치를 설파하는 것은 종교지도자로서 당연히 추구해야 할 그의 몫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지난 15일 대전에서 나온 “올바른 정신적 가치와 문화를 짓누르는 물질주의의 유혹에 맞서라”는 교황의 메시지는 한국 사회와 개신교계에 시사하는 바 크다. 물질주의는 물질이 최우선임을 고백하는 생각이기에 자본(돈)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떠받드는 현대자본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자본주의의 기원을 프로테스탄티즘에서 찾았던 막스 베버(1864∼1920)의 시각에서 본다면 지금의 자본주의는 출발선에서 한참이나 벗어나 있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에 따르면 초기 자본주의의 동력은 개신교인들의 근면과 이웃사랑이다. 개신교인들은 하나님께 하듯 이웃을 섬겨야 한다는 기독교적 가치(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를 매일매일 자기점검하면서 가능하면 값싸고 좋은 물건·서비스를 이웃들에게 공급하려는 노력(자본주의의 정신)을 아끼지 않았다. 덕분에 그들에게는 자연스럽게 부가 쌓이고 이런 과정이 점점 더 확대·확산되면서 본격적으로 자본주의가 뿌리내렸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어느 순간을 넘어서면서부터 자본주의는 홀로 걷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개신교인들의 이웃사랑은 어느 새 뒷전으로 물러나고 자본이 자본을 낳고 이윤이 이윤을 부르는 식으로 자본주의의 정신이 급격히 풍화되기 시작하더라는 것이다. ‘이웃사랑→자본주의의 정신→청부(淸富)’로 이어지는 메커니즘에 균열이 생기면서 사태는 미묘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베버 역시 앞 책에서 이 점을 크게 우려했다.

베버의 주장은 간결하게 이념형(理念型·Ideal Type)화한 것인데 한국의 상황에 비춰 봐도 꽤 부합한다. 한국 사회는 짧은 시간에 공업화·산업화 등 자본주의적 성장을 거듭해온 탓에 그와 더불어 빠른 속도로 정신적 가치에 대한 훼손이 두드러져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이고 물질적인 압축성장과 함께 정신적이고 배려적인 가치의 압축훼손이 벌어졌던 것이다. 개신교계조차도 ‘이웃사랑→자본주의의 정신→청부’의 흐름에 대해서는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도 그 다음 과정에서 벌어지는 이 흐름의 균열에 대해서는 대부분 입을 다물고 있다.

교회와 자본주의의 병존은 그만큼 어려운 문제다. 기독교적 가치가 초기 자본주의 단계에서 자본주의와 선택적 친화관계에 있었다고 해도 하나님과 이웃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보는 입장과 자본을 최우선시하는 입장은 쉽게 병립하기 어려운 대립적 관계라는 점을 개신교계가 깊이 인식해야 한다. 이는 가톨릭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세월호 참사, 군 폭력 등 지금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대부분 병폐는 정신적 가치의 훼손에서 문제의 단초를 찾아볼 수 있다. 개신교계를 비롯해 우리 사회가 물질주의 경계론을 받아들이고 치밀하게 대응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앞으로 더 많은 문제군에 직면하게 될 수밖에 없다. 다시 온다는 메시아는 아직 오지 않았고 이를 준비하는 일은 우리의 몫으로 남았다.

조용래 편집인 jubi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