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양심의 법은 사랑의 법이다

입력 2014-08-15 02:36 수정 2014-08-15 13:27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인생을 범사마다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섬긴 인생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렇다면 그 양심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로마서 2장 15절은 우리 마음에 기록된 율법이라고 설명합니다. 양심은 마음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섬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양심은 성령 하나님의 보좌이며, 성령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히브리서 9장은 대속죄일의 제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1년에 단 한 번인 대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 법궤를 덮는 판인 속죄소에 짐승의 피를 뿌립니다. 속죄소에 짐승의 피를 뿌리는 의식은 그리스도의 피를 우리 양심에 뿌리는 것을 예표합니다. 즉 속죄소를 우리의 양심에 대칭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죄소는 성령 하나님의 보좌입니다(출애굽기 25장 22절). 즉 양심은 성령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보좌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는 것처럼 양심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갑니다. 다시 말해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양심을 통해 말씀의 빛을 비추십니다. 마음에 기록된 율법인 양심을 통해서 이성과 정서라는 인격적 기관을 향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끗한 양심을 유지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입니다. 깨끗한 양심과 왜곡된 양심을 분별하는 정확한 기준이 있습니다. 율법은 사랑의 법이며,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깨끗한 양심은 반드시 사랑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왜곡된 양심은 정죄와 비방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소설과 연극, 영화로도 만들어진 문학작품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은 성전에서 은촛대를 도둑질해서 경찰에 체포됩니다. 그때 은촛대의 주인인 신부는 사법경찰관 앞에서 위증합니다. 장발장의 죄를 덮어줍니다. 그리고 보혈의 능력으로 죄를 이기라고 말합니다. 반면 자베르 경관은 장발장을 단죄하기 위해 끝까지 그를 추적합니다. 신부는 예수님의 사랑을 대표하는 인물이며, 자베르 경관은 율법주의자를 대표하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성결한 양심은 어떤 마음일까요.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기도로 철저히 죄를 죽이되, 죄인은 용납하는 용서로 드러납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바로 죄인에 대한 용서라는 반석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한한 용서를 받은 우리는 죄를 지은 형제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작금의 현실을 보노라면 범죄자들을 정죄하고 비방하는 것이 마치 정의인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과 함께 식사했습니다. 그러나 죄인을 향해 돌을 던지는 율법주의자들을 대적했습니다. 성령 충만의 적은 ‘죄악 충만’이 아니라 율법주의입니다. 그래서 영국 역사가 폴 존슨은 예수행전이라는 책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정의보다 자비에 더 관심이 많다. 엄격한 정의의 잣대를 들이댄다면 그 누구도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 때문에 최악의 죄인들도 잘못을 인정하고 선한 삶을 살기로 마음먹을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이다.”

간구는 부르짖음의 기도입니다. 나를 위한 간구는 나의 죄를 죽입니다. 타인을 위한 간구는 타인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과 성결을 이뤄가도록 돕습니다. 기도와 사랑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