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피플] ‘근로정신대 시민모임’ 고문 김희용 목사

입력 2014-08-15 02:41
김희용 목사가 13일 서울 광화문광장에 마련된 ‘4·16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한 금식기도단’ 농성장 앞에서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에 대한 관심을 호소하고 있다. 허란 인턴기자

“근로정신대는 일제 강점기인 1944년 8월 이후 일본 전범기업에 끌려가 강제 노역에 시달린 조선인 미성년 여성을 말합니다. 아름다운 10대 시절 군사 무기를 만드는 일본 기업 미쓰비시와 후지코시에서 돈 한 푼 받지 못한 채 하루에 10시간 이상 일했던 여성들이에요. 미쓰비시에 끌려간 여성이 200명이 넘는데 이들을 제대로 기억해주는 이들이 없어요.”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에 대한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의 사과와 배상을 촉구해온 김희용(55·광주 넘치는교회) 목사의 이야기다. 제69주년 광복절을 이틀 앞둔 13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만난 김 목사의 얼굴은 어두웠다. 세월호 유가족과 고통을 나누기 위해 이날 서울을 찾은 그는 금방이라도 굵은 눈물을 떨어트릴 듯했다. 단식농성을 시작한 탓만은 아니었다. 광복절이 또다시 다가오지만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열악한 삶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광복된 지가 내년이면 70년이에요. 한 사람의 평생이 지나도록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겁니다. 어린 나이에 억울한 징용을 당한 할머니들은 제대로 된 사과 한마디 듣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있습니다.”

실제 미쓰비시 등 전범기업은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할머니들이 퇴직금 형식으로 쌓아둔 후생연금 탈퇴수당에 대해 미쓰비시가 2009년 청구자 1인당 99엔(약 1000원)을 지급한 사건은 유명하다. 꿈쩍도 하지 않는 이들에 맞서 김 목사는 2009년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근로정신대 시민모임)’을 만들어 싸우고 있다. 현재는 근로정신대 시민모임의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 목사가 처음부터 근로정신대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던 건 아니었다. 교인이 30명 정도인 작은 교회를 섬기고 있지만 목회를 할 수 있다는 데 만족하던 목사였다. 그를 이끈 건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2008년 여름 이금주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 회장으로부터 처음으로 근로정신대 피해 할머니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죠. 궁금해서 알아보니 피해 할머니 대부분이 전남 지역에 사시더군요. 제가 있는 곳에 도움이 필요한 분들이 있는데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김 목사는 그해 말 곧바로 전범기업의 사과와 배상을 이끌어 내기 위해 근로정신대 시민모임을 만들기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광주 시민들을 대상으로 근로정신대의 피해 실태를 알리고 전범기업의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는 서명운동도 시작했다. 시민 3만여명의 지지를 얻어 2009년 3월 공식 출범했다.

이후 김 목사는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뛰어다녔다. 2009년 10월 미쓰비시자동차 광주전시장이 들어설 때는 시민들과 함께 208차례 1인 시위를 벌여 철수를 이끌어 냈다. 2008년 일본 최고법원에서 최종 기각된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한국에서 다시 제기했다. 지난해 11월 광주지방법원은 미쓰비시에 대해 양금덕 할머니 등 이 소송의 원고 5명에게 각 1억5000만원씩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미쓰비시는 판결에 불복, 현재 2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골리앗과 같은 일본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꾸준히 돌을 던지고 있는 그는 우리나라의 모든 크리스천이 근로정신대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이 광복절을 맞이하는 소원이라고 했다. 그는 그것을 ‘크리스천의 당연한 소명’이라고 표현했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죽어서 자신이 천국에 갈 것만을 목표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천국을 가기 위한 분명한 삶의 족적을 남겨야 해요. 그 행동은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만 갇혀 있을 게 아니고 현실 속에서 아픔을 겪는 이들과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진삼열 기자 samu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