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2005년 미국 스탠퍼드대 졸업식에서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다. 항상 갈망하고 우직하게 나아가라(Stay Hungry, Stay Foolish).” 췌장암 진단을 받았지만 그는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인생도 드라마틱했다.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난 잡스는 양부모에 입양돼 자랐으며 대학을 중퇴했다. 아버지의 창고에서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를 만든 것이 애플의 시작이었다. 잡스는 자신이 설립한 애플사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하지만 넥스트와 픽사라는 다른 회사를 시작하며 재기했다. 내리막을 걷던 애플은 다시 그를 영입할 수밖에 없었다. 잡스는 2011년 10월 췌장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아이폰 후속제품 개발에 매달리며 세상을 혁신적으로 바꾸고 싶어 했다.
스티브 잡스가 도전과 혁신의 아이콘이라면 우리나라에는 7전8기의 박병엽 팬택 전 부회장이 있다. 팬택에는 회장 직함이 없다. 팬택 창업자인 박병엽의 직함은 늘 부회장이었다. 이유를 물으면 “회장님은 아버지”라고 한다. 아버지는 뭐 하시느냐고 물으면 “노신다”고 한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아직 ‘회장’ 직함을 달 만큼 회사나 자신이 성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맥슨전자 영업사원이던 그는 29세 때인 1991년 종자돈 4000만원으로 직원 5명과 함께 무선호출기(삐삐) 회사인 팬택을 세웠다. 97년에는 CDMA 방식의 휴대전화 사업으로 영역을 넓혔고, 2000년대 들어 현대큐리텔과 SK텔레텍을 인수하며 세계 7위 휴대전화 업체로 키웠다. 국내에선 LG전자를 누르고 2위에 오르기도 했다.
박 전 부회장은 2007년 팬택이 경영난으로 1차 워크아웃에 들어가자 4000억원대 보유 주식을 내놓으며 회사 살리기에 앞장섰다. 팬택은 5년 연속 흑자를 내면서 2011년 말 워크아웃을 졸업, 화려하게 부활했다. 하지만 자본으로 무장한 공룡 대기업들과의 싸움에 팬택의 경영난은 가중됐고 박 전 부회장은 지난해 9월 실적 악화의 책임을 지고 팬택을 떠났다.
팬택이 엊그제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지방대 출신의 ‘빽 없는 놈’은 발로 뛰어야 한다며 밤낮없이 일하고, 노조가 자발적으로 임금을 동결하겠다고 하자 “샐러리맨들의 유일한 꿈은 월급 오르는 것인데 그걸 뺏으면 안 된다”며 직원들을 챙기던 ‘으리’의 사나이 박 전 부회장의 모습이 눈에 밟힌다. 하지만 그의 도전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에 돌아올 그의 모습 또한 기다려진다.
이명희 논설위원 mheel@kmib.co.kr
[한마당-이명희] 오뚝이 박병엽
입력 2014-08-15 0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