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서둘러 시심으로 맞이하러 나간다. 뜨겁게 달구어진 머리가 차분해지며 자연의 어김없는 섭리에 대한, 부산히 엷어졌던 경외감이 일깨워진다. 새 계절을 맞이하기 위해 시집 한 권을 읽는 것은 벌써 수년을 가꾼 습관이다. 기억의 서가에서 읽고 싶은 시인들의 이름을 떠올리다가 김현승의 시선집 앞에 멈춘다.
“가장 고요할 때/ 가장 고독할 때/ 내 영혼이 누군가의 사랑을 기다리고 있을 때”(‘책’) 책을 열듯이. 김현승 시인은 유독 가을 시편을 많이 썼다. 끝나가는 계절로서가 아니라 돌아오는 길목이자 참회의 시간으로서의 가을에 대해 그만큼 잘 알고 있는 시인도 드물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의 시는/ 수요일의 기도보다 가벼웠고/ 너무도 오랫동안/ 나는 나의 체온을 비워두었다.”(‘가을의 입상<立像>’)
김현승 시인은 삼백여 편의 시를 남겼으니 왕성한 필력을 자랑하는 요즈음의 시인들에 비하면 그 양이 빈곤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만큼 견고함과 겸허가, 지적인 성찰과 여린 감성이, 엄격성과 자유가, 현실감각과 윤리의식이 균형적으로 공존하는 시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한마디로 김현승은 다시 만나고 싶은, 삶에서도 시에서도 격조 있는 시인이었다.
그의 시들은 또한 뿌리 깊이 기독교적이면서도 기독교인들에게만 그 의미가 읽히는 범주를 넘어 모든 이의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독자들을 그의 시 안으로 쉽사리 끌어들이되, 그 안에 오래 머무르게 한다. 단순한 물상의 평범한 듯한 관찰에서 이런 시가 나오는 것이다. “당신의 불꽃 속으로/ 나의 눈송이가/ 뛰어듭니다./ 당신의 불꽃은/ 나의 눈송이를/ 자취도 없이 품어줍니다.”(‘절대신앙’)
그러나 내가 자취도 없어지는 지점, 그런 나를 자취도 없이 품어주는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깊은 묵상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이 스마트한 시대에 믿음과 시, 믿음과 문학의 관계는 줄 위의 곡예사처럼 균형 잡기가 수월치 않기에 그가 거쳐 온 시의 궤적을 의미심장하게 따라가본 적이 있다. 물론 그가 시인으로서 가로지른 시대는 어두웠다. 그러나 이때나 저때나 둘 사이의 불완전한 관계에는 변함이 없다. 시가 크면 믿음이 기운다. 또 믿음이 앞서면 시가 기운다. 김현승 시인도 이 줄 위의 곡예를 물론, 지금보다 더 격렬하게 경험했다. 도대체 하늘에서 직접 파송된 천사가 아니라면, 히브리서가 입이 마르게 칭송한 예외적 믿음의 선진들이 아니라면 일생을 걸쳐 한 치의 높낮이 없이 여일한 믿음을 유지하는 범인은 많지 않다.
시인은 세상살이 한가운데서 시심을 긷는, 세상을 향해 말을 걸어야 하는 범인 중의 범인이다. 강렬한 제목으로 인해 독자의 뇌리에 각인된 ‘견고한 고독’, ‘절대고독’ 같은 시집에서 그 흔들림의 흔적을 본다. 한국시에서 드물게 철학적이고 사변적이라 평가되는 이 시집들에서 시인은 자신을 일생 이끌어온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의혹으로 신에게서 멀어진 인간의 절대고독을 경험한다. 그러나 김현승 시인의 절대고독에서조차 독자는 절대고독의 원형, 십자가 위에서 버림받은 순간의 예수 그리스도의 외침, 그 반향을 듣지 않을 수 없다.
흔들리지 않고 견고해지는 믿음은 드물다. 고난의 신비가 기독교 정수의 한 축을 차지하듯이 김현승의 말년의 시는 절대고독과 고난을 거쳐 초기의 순수한 눈물을 회복한다.
이마가 싱그럽게 차가운 가을을 맞이하기 위해 영혼이 살아있는 시를 읽자. 시집 전체를 읽기 어려우면 한 편의 시를 암송하자.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중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듬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주시다.”
시인은 말한다. 이 지상에 오직 썩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신 앞에서 흘리는 눈물뿐이라고.
최윤 (소설가·서강대 교수)
[최윤의 문학산책] ‘눈물’의 시학
입력 2014-08-16 0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