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사는 지역에는 둘레길이 잘 조성되어 있는 산이 있습니다. 둘레길 초입부터 곧은 소나무가 둘러싸여 주변의 건물과 차로에서 벗어나 숲 한가운데 있는 느낌을 받습니다. 하지만 순수 자연을 만끽하는 눈의 만족과 다른 것이 방해를 합니다. 바로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차 소리입니다. 경적소리가 없는데도 도로를 질주하는 차 소리는 왜 이리 큰지요. 자연에 묻혀 있는 지금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이제는 그 소리도 묻히고 자연만이 나를 감쌉니다.
길을 걷지만 어딜 가도 내가 보고픈 이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 그가 없다는 게 너무 서운합니다. 동시에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시 139:7∼8) 말씀에서처럼 어디에나 하나님이 계시다는 게 야속합니다. 왜 하나님은 어디나 계시는데 내 아이는 어디에도 없나요?
세대 차이라고 해야 하나요. 누구는 일제치하를 생각하면서 일본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상실을 가져왔는지 생각합니다. 누구는 6·25전쟁을 생각하면서 공산주의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상실을 가져왔는지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세월호 참사를 생각하면서 외부가 아닌 우리 내부에서 우리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상실을 가져왔는지를 이해하지 않습니다. 저 또한 타인과 공유되지 않는 개인의 상실을 경험하면서 이해 부족이 제게 주는 또 다른 상처를 느끼고 더 깊이 산속으로 들어갑니다. 해는 지고 안개는 가득합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산을 내려오지만 시야가 좋지 않습니다. 뜻 모를 두려움이 나를 붙잡아서 몇 번이고 주변을 둘러보게 됩니다.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바라고 잠에 들었습니다. 광야에 들어가 하룻길을 간 시점과 장소입니다. 그가 뭐라고 했는지 아시나요?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왕상 19:4)고 했습니다. 지금 여기가 딱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그 넉넉한 시점이 늘 다시 찾아와서 현재가 됩니다. 이 못난 내가 원인이라는 생각이 가득합니다.
다양한 부정적 경험에서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그 문제들이 자기 탓이라고 여깁니다. 부모가 이혼하는 것도 자기가 잘못해서 엄마 아빠가 싸웠다고 생각하고, 가족 중 누군가가 교통사고로 크게 다치면 자기가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커가면서 우리는 내 탓이 아닌 결과도 많다는 것을 알고 구분하게 됩니다. 그런데 큰 충격의 경험에서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어린아이가 됩니다. 모든 것이 내 잘못으로 여겨지고, 모두가 나를 탓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나는 어린아이로 이 산속에 남아 있을까요. 아니면 어른이 되어 이 산을 이제 걸어 나와야 할까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이러한 시는 음침한 골짜기에 있을 때 절대 나오지 않습니다. 골짜기에서 나오고 나서야 부를 수 있는 시입니다. 유민이 아버지가 세월호 참사로 단식을 한 지 30일이 넘었습니다. 정신의학자로서 그의 단식은 앞으로 다시는 비슷한 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근본적인 대책의 촉구로 보이지만, 한 아버지로서 그의 단식은 자기가 죽어도 괜찮은 어떤 열망으로 보입니다.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서로 끊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가로등 불빛이 눈에 들어오며 산행의 끝을 알립니다. 자, 이제 세상으로 다시 나갑니다.
최의헌 <연세로뎀정신과의원>
[최의헌의 성서 청진기] 밤에 산길을 걷다
입력 2014-08-16 02: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