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 장차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당하실 것을 세 번 되풀이해서 말씀하셨다. 그 첫 번째는 헤르몬 산 자락의 바네아스 계곡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시고서 말씀하셨고, 두 번째는 ‘높은 산’에서 내려와 간질에 걸린 아이를 고쳐주신 후 갈릴리로 돌아온 후에 다시 말씀한 것이다.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마 17:22∼23)
그러나 마가는 이때부터 예수께서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조심하셨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가 속건제물이 될 것은 이미 정해졌고, 그 장소도 예루살렘으로 예비되었으나 아버지의 ‘때’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가 지정하시는 ‘때’를 신중하게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 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막 9:30∼31)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도 알지 못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막 9:32)
예수께서 자신이 고난당하실 것을 미리 제자들에게 일러주신 말씀 가운데 한 가지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예수께서 늘 아버지의 뜻을 물으며 기도하고, 두드려서 응답받아 알아낸 자신의 사명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속건제물’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삼일’에 살아난다는 말씀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요 8:26)
들은 것을 말하셨다는데 그렇다면 ‘제삼일’에 살아난다는 말씀을 언제 들으셨을까?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어떤 교감이 있었는지 모르나 적어도 네 복음서의 기록에서 그런 내용은 발견되지 않는다. 만일 그분이 ‘제삼일’에 살아날 것을 미리 다 알고 계셨다면 겟세마네의 고뇌와 ‘이 잔을 옮겨’ 달라는 간절한 탄원은 성경 밖에 있는 ‘제삼자’들을 납득시키기 어렵다.
“성경에 사람이 죽고나서 다시 살아난 경우가 있는가?”
아담 이후로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죽었다. 아주 특이한 사례로는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진(히 11:5) 에녹과 회오리 바람을 타고 승천한(왕상 2:11) 엘리야가 있고, 죽었으나 무덤을 찾지 못한(신 34:5∼6) 모세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선지자의 기도로 죽었다가 살아난 사례가 있다.
“엘리야가 그 아이를 안고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그의 어머니에게 주며 이르되 보라 네 아들이 살아났느니라.”(왕상 17:23)
그 아이는 시돈 지방의 사르밧에 사는 과부의 외아들이었다. 엘리야의 후계자인 엘리사도 수넴 여인의 죽은 외아들을 살려냈다.
“엘리사가 이르되 네 아들을 데리고 가라.”(왕하 4:36)
예수께서도 죽은 자를 살리신 적이 있다. 나인성에서 관 속에 있던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셨고, 가버나움 회당장의 딸이 죽었을 때 그 손을 잡아 일으키셨다. 그러나 다시 살아난 자들은 영생한 것이 아니라 후일 다시 죽었다. 그와는 다르게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부활’에 관한 소망을 전하셨다.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시 16:10, 한글개역판)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사 26:19)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한즉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겔 37:13)
그렇다면 성경이 들려주는 ‘제삼일’이란 무엇인가?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제삼일’에 요단강을 건넜다. 성경에서 광야는 하나님의 성막과 함께 가는 행군을 의미하고, 요단강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출발선이었다.
“사흘 안에 너희가 이 요단을 건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사 차지하게 하시는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들어갈 것임이니라.”(수 1:11)
여호수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적 인물이었고, ‘예수’는 ‘여호수아(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의 헬라식 이름이었다. 예수께서도 ‘가나안 진입’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비유하여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1:12). 여호수아의 본명은 ‘호세아(구원)’인데(민 13:16) 선지자 중에도 ‘호세아’가 있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호 6:2, 한글개역판)
선지자들을 통해 주신 말씀을 읽으며 예수께서는 이 ‘제삼일’이야 말로 우리가 살아나는 날이 될 것임을 깊이 생각하고 계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했을 때, 호세아의 아내 고멜처럼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게 보여 줄 것은 사흘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요나의 표적’ 밖에는 없다고 하신 것이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마 16:4)
아밋대의 아들 요나는 앗수르의 큰 성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려고 욥바 항에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탄다. 항해 중에 큰 풍랑이 일어나 승객들이 모두 죽게 되었을 때에, 요나는 자기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려다 이렇게 되었음을 고백하고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한다. 그들이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자 곧 풍랑이 그쳤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욘 1:17)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욘 2:9)
그러자 물고기는 요나를 육지에 토했고, 그가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전하자 니느웨의 왕과 대신들과 백성이 일제히 금식하며 부르짖고 회개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의 몸이 썩지 않고 살아난 것도 기적이지만 요나가 승객들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바다에 던져지기를 자원했다는 것과 그의 기도가 예수께 깊은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글=김성일 소설가, 사진 제공=이원희 목사
[예표와 성취의 땅, 이스라엘] (14)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②
입력 2014-08-15 0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