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아시안게임 성화 든 6·25 반공포로

입력 2014-08-14 02:08
연합뉴스

지난 9일 오후 5시 인도 뉴델리 도심 라지파트에서 한 한국 노인이 인도 청년으로부터 인천아시안게임 성화를 건네받았다. 35도를 넘는 무더위에 다른 주자들처럼 힘차게 뛰지는 못했지만 그는 뉴델리 시민에게 손을 흔들어 줄 만큼 건강했다. 인도에 남은 마지막 반공포로 현동화(82·사진)옹이었다. 12일 다시 만난 현옹은 “누군가 나를 우리 근대사의 조난자라고 지칭했다. 참 용케 살아남았다”며 굴곡진 생애를 풀어놓았다고 연합뉴스가 보도했다.

1932년 함북 청진에서 태어난 현옹은 원산의 한 전문학교에 다니다 49년 말 평양의 사동군관학교에 입학했다가 7개월 만에 인민군 장교로 강원도 화천에 투입됐다. 낙동강 전선에서 장교들이 많이 죽자 빨리 임관한 것이다. 그는 화천에 들어온 국군 10사단에 귀순 의사를 밝히고 스스로 포로가 됐다. 공산주의가 결과만 강조하고 개인은 없어 참전 전부터 반감이 컸다고 그는 이유를 설명했다.

현옹은 중립국을 택한 경위가 소설처럼 극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는 “포로는 많고 시일은 촉박한데 중립국감시위원단이 당사자 의사를 일일이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했다”며 “시간만 보내다가 중립국 갈 사람들은 이쪽으로 가라고 해서 나갔다”고 밝혔다.

현옹은 54년 2월 반공포로 87명과 함께 수송선 ‘아스토리아’를 타고 일단 인도 마드라스(현재 첸나이)로 들어왔다. 뉴델리 인근의 부대 막사에 살게 된 그는 멕시코행을 기다렸으나 당국의 응답이 없어 다른 3명과 함께 인도에 정착했다. 인도 정부에서 58년 빌려준 1만 루피(17만원)를 종잣돈으로 양계장 사업을 시작했고 인모(人毛)수출, 인력송출, 아프가니스탄 섬유공장 등 사업에서 성공을 거뒀다.

그는 62년 인도에 한국총영사관이 생기면서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북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서울에 정착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69년 한국 땅을 다시 밟고 결혼을 했다. 현재 아들은 서울의 IT 업체에서 일하고 있고, 딸은 미국에 살고 있다. 그는 20여년간 인도한인회장을 맡아 한국과 인도의 민간교류에 힘써왔다. 현옹은 인천아시안게임에 북한이 참가하는 것에 대해 “자꾸 왔다 갔다 하면 북한도 변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정건희 기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