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카이(堺)시에 있는 재일 동포 노인들을 위한 요양원 제1호 '고향의집' 이사장실 벽면에는 납골당이 있다. 고향의집에서 세상을 떠난 노인들을 모시는 추모의 벽으로, 영안실로 쓰이던 곳을 이사장실로 개조하면서 만들었다. 윤기(72) 숭실공생복지재단 명예회장이 "내가 죽으면 전남 함평 선산에 유골 절반을, 나머지는 우리 어르신들과 같이 추모의 벽에 남겨달라고 할 것"이라고 말하자 마주 앉은 가수 유열(53)씨가 "추모의 벽이 저랑 선생님 인연의 시작이었다"고 화답했다. 지난달 25일 서울 예술의전당 앞에서 고향의집 덕분에 스무 살의 나이 차를 극복하고 십년지기가 된 두 사람을 만났다.
유씨는 2004년 ‘사카이 고향의집에 납골당을 만들기 위한 자선음악회에 와 달라’는 윤 명예회장의 초청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유씨가 특별출연한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사랑받은 직후였다. 유씨는 1700석이 꽉 찬 것에 깜짝 놀랐다고 했다. 그는 “윤 선생님이 일본에서 다져온 네트워크의 힘이 느껴졌다”고 했다. 이후 유씨는 10년 동안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고향의집을 돕고 있다.
오랜 유학과 일본 생활을 해온 윤 명예회장은 누구보다 재일교포 노인들의 고충에 공감하고 있었다. 윤 명예회장은 “돈이 많고 지위가 높아도 외국생활을 하면 필연적으로 채워지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며 “‘타향살이’라는 한국 노래를 들으며 외로움을 달랬다”고 말했다.
1984년 한 재일동포 할머니가 숨진 지 13일 만에 발견된 데 이어 오사카에서도 재일교포가 고독사한 지 6개월 만에 발견됐다. 이는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었던 일본 사회에도 적잖은 충격을 남겼다. 재일동포 노인들을 돕기 위해 한·일 양국의 사회복지단체와 크리스천들이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각종 활동에 제약을 받으며 평생 고향을 그리워했던 할머니는 고향의 부모 형제와 고향 산천을 그려보며 어머니라고도 불러보고, 한국음식 맛도 떠올려보다가 돌아가셨을 것입니다.” 윤 명예회장의 설득에 많은 일본인이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한국인답게 온돌방에서 한국어를 하면서 김치를 먹는 양로원을 만들자’는 윤 명예회장의 다짐은 일본 크리스천들을 중심으로 ‘재일한국인 노인홈을 만드는 회’가 조직되면서 현실이 됐다. 이렇게 만들어진 게 고향의집이다. 유씨는 “특별한 추진력 덕분에 윤 선생님의 별명이 ‘지금 곧’이다”라며 “고향의집 건립에도 선생님의 별명이 빛을 발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10년간 고향의집을 오간 유씨는 이곳을 ‘숙연’과 ‘평화’의 집으로 묘사했다. 그는 “오랜 기간 일본에서 외롭고 힘든 시절을 겪었을 어르신들의 아픔 때문에 숙연해지면서도 ‘한국의 정’을 핵심 가치로 삼아 어르신 두 사람당 자원봉사자 한 명이 꼼꼼히 돌보는 평화로운 일상에 빠져들게 됐다”고 말했다.
고향의집은 입소자들이 모이는 ‘가족 모임’을 통해 돌봄서비스 질을 지속적으로 개선하고 있다. 끊임없이 소통하며 생활의 질을 높여가는 운영방식이 입소문을 타면서 일본인 입소자도 늘어나 전체 입소자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재일교포 노인들을 위한 시설이지만 ‘일본인은 안 된다’는 규정은 역차별이 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일본인 입소 희망자도 받아들인다고 한다. 유씨는 “고향의집은 자원봉사자도 재일교포와 지역 주민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돼 있다”며 “이곳에서만큼은 역사적인 갈등은 뒤로 하고 서로를 인정하고 돕고 배려함으로써 한·일이 하나가 되어 공생한다”고 설명했다.
윤 명예회장은 “고향의집에는 한·일 간의 화해와 용서, 위로와 응원이 있고 문화는 그 징검다리가 된다”며 곁에 앉은 유씨를 보고 활짝 웃었다. 유씨는 ‘복지는 문화’라는 철학을 내세우는 고향의집을 위해 정식 공연 외에도 수차례 ‘힐링 콘서트’를 열었다. 교토(京都) 고향의집 광고를 제작할 때는 겨울연가 윤석호 PD, 배우 안성기씨와 권해효씨 등이 참여하도록 주선하기도 했다. 한류스타인 장근석씨가 숭실공생복지재단 100주년 축하 메시지를 보낸 것도 유씨의 노력으로 이뤄진 결실이었다.
숭실공생복지재단은 2015년 도쿄(東京)에 4번째 고향의집 착공을 앞두고 있다. 유씨 등을 비롯한 한류스타들의 적극적인 홍보는 일본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500엔, 1000엔씩 보태는 사람들이 늘었고 일본 기독교계의 도움도 더해져 건축비 260억원 중 200억원을 이미 확보했다. 나머지는 공생가족기금 등을 통해 충당할 계획이다. 윤 명예회장은 “재일동포 어르신들에게는 ‘여러분을 잊지 않고 있다’는 메시지가 절실하다”며 “한·일 양국을 원망도 하며 한평생을 고생한 이들은 고국의 온정을 기다린다”고 말했다. 그는 “재일동포 어르신들이 ‘한국인’의 정체성을 되새기고 당신 인생이 헛되지만은 않았음을 느끼도록 물질로 방문으로 또 기도로 응원해 달라”고 덧붙였다.
유씨도 맞장구를 쳤다. 그는 “살면서 많은 여행을 하는데 그중에 고향의집 방문이 꼭 한 번 있었으면 한다”며 “직접 겪고 느낀 만큼 더 알고 표현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 그런 마음으로 고향의 집을 응원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수민 기자 suminism@kmib.co.kr
[화해와 평화를 위한 공생의 길] 한평생 日서 고생한 어르신들에 ‘한국의 情’ 선물해야
입력 2014-08-13 01:15 수정 2014-08-13 15: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