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천에서 태어난 이분이(92·사진) 할머니는 10세이던 1932년 일본 고베로 건너갔다. 아버지는 더 나은 삶을 기대하며 일본에 있는 삼촌을 따라 식구를 이끌고 갔지만 적당한 일거리를 찾지 못했다. 아버지는 매일 술을 마셨고, 가족의 삶은 점점 퍽퍽해졌다. 이 할머니는 14세 때 가족들을 떠나 히메지(姬路)의 봉제공장에서 일하며 사실상의 가장이 됐다. 그는 “조선으로 돌아가라는 일본인들의 멸시와 홀대는 일상이었다”고 고백했다.
19세에 결혼을 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시어머니, 시누이와 지내는 좁은 집에서 남편은 일도 하지 않고 술만 마셨다. 2남3녀를 낳은 이 할머니는 또다시 집안의 가장이 됐다. 이 할머니는 1년에 두 번 추석과 설날을 제외하고는 닥치는 대로 건축, 토목 일을 했다.
이 할머니가 스물두 살 때 일본이 도발한 2차 세계대전을 겪었다. 미군의 포격이 휩쓸고 간 마을은 폐허가 됐고 삶의 터전은 화염 속에 사라졌다. 폭탄을 피해 터널 밑에 숨어 물만 마시는 생활이 이어졌다.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38년 한신 대수해, 95년 고베 대지진도 이 할머니의 삶에 상처를 남겼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큰딸과 작은딸이 병으로 먼저 숨졌다. 큰딸이 남긴 손주 3명을 기르는 것도 이 할머니 몫이 됐다. 이 할머니는 “내가 대신 죽고 싶었다”며 “왜 내게만 이런 인생이 펼쳐지는지 원망스러웠다”고 말했다. 52세 때 남편을 여읜 할머니의 고달픈 건축 일은 70세가 되던 해까지 계속됐다.
자녀들이 독립하면서 삶도 조금은 편해졌다. 68세가 되던 해부터 3년 동안 친구들과 야간 중학교의 일본어 교실에 다녔다. 그런 행복도 잠시, 2009년 9월 뇌경색으로 쓰러진 이 할머니의 왼쪽 몸에 마비가 찾아왔다. 혼자 생활하기가 어려워진 할머니는 2011년 4월 고베 ‘고향의집’에 입주했다. 이 할머니는 “한국 정서가 통하는 재일교포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만나고 한국 직원들 도움으로 말년을 보내게 돼 행복하다”고 말했다.
일본의 강제징병으로 1945년까지 110만여명의 한국인이 일본으로 이주했다. 지난해 기준 65세 이상 재일동포 노인은 11만4313명에 달한다. 한국에 두고 온 가족들과 생이별한 이들은 일본에 정착한 뒤에도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노골적인 차별의 대상이 됐다.
1984년 재일동포 노인이 숨진 지 13일 만에 발견되면서 일본에서 고독사가 사회적 문제로 불거졌다. 이듬해인 85년 500여명의 일본인을 중심으로 재일동포 노인들을 돌보기 위한 ‘재일한국인 노인홈을 만드는 회’가 결성돼 고향의집 건립과 운영지원을 진행했다. 숭실공생복지재단은 4년간 일본 시민과 문화·종교·복지전문가들과의 협력을 바탕으로 1989년 사카이시에 재일한인 노인들을 위한 제1호 고향의집을 열었다. 이어 오사카(1994년) 고베(1994년) 교토(2009년)에 고향의집이 문을 열었고 현재 4곳의 시설이 운영되고 있다.
시설에 대한 재일동포 노인들의 만족도는 매우 높다. 한국 이름으로 생활하고 한국 음식을 맘 편히 먹을 수 있다. 한국문화를 즐기며 정서적 안정도 누리고 있다. 고향의집에 머무는 재일동포 노인은 총 238명이며 이 가운데 생활보호대상이 54.1%에 달한다. 현재 100여명의 재일동포 노인들이 고향의집 입소를 기다리고 있다.
전수민 기자
[화해와 평화를 위한 공생의 길] 3년전 ‘고향의집’ 입주한 이분이 할머니
입력 2014-08-13 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