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이맘때쯤이면 꼭 생각나는 한 물음이 있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 친구 혹은 연인은 가능한가, 하는 물음이 그것이다. 남성이라는 성이 우월적으로 지배하는 구조 아래서 던져지는 이 물음은, 하긴 이미 시효가 지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어느 해인가 여름의 뜨거운 햇빛 아래서 절망적인 얼굴이 되어 이런 물음을 던지고 사라져 버린 그 친구는 여름을 나의 기억 속에 각인시키고 있다. 오늘 나는 다시 묻는다. 그리고 또 같은 답 속에 빠진다.
역사에는 가끔 연인이며 친구이려 하던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 가장 첫 번째 예로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를 흔히 이야기하곤 한다. 보부아르 입장에서 보면 사르트르는 가장 말이 잘 통하는 남성이되, 가장 사랑이 가능한 지성이기도 했으리라. 그들의 이상은 환상의 방에서 쌍무지개같이 뜨다가도 파티로 부르는 음악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게 되곤 했으리라. 못생긴 사르트르의 얼굴은 이상(理想)의 쌍무지개 앞에서 아름다운 개구리 왕자가 되었으리라.
실비아 플라스와 테드 휴즈도 그런 이상과 현실의 사이였으리라. 하도 재미있고 슬퍼서 영화로 더 유명해진 플라스는 똑똑한, 촉망받는 미국의 여성 시인이었으며 대학 강사였고 아름다웠다. 휴즈도 가난했으나 촉망받는 젊은 영국의 남성 시인이었다. 그 남성 시인의 ‘엄청난 가난’도 시라는 무지개 앞에선 낮고 낮은 들판이 되고 있었으며 그래서 그들은 부모 몰래 결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휴즈가 친구이며 연인이라고 생각한 실비아는, 휴즈가 시인으로서 이름을 얻고 있는 사이 부엌과 아기 침대와 침실 사이에서 파괴되어 갔으며 시는 그 방들의 커튼 사이로 슬몃슬몃 소멸하고 있었다. 결국 그들의 이상은 실비아의 자살로 끝이 났다.
우리의 근대를 생각해도 그런 사랑들은 흐느낌 속에 떠오른다. 아마 그 제일의 ‘영원한 물음’은 노래 하나를 남긴 윤심덕이리라. 윤심덕과 그의 연인인 김우진 변호사는 아마도 영원한 대화를 꿈꾸다 바다로 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아마 나혜석도 그런 이상의 무지개를 좇아 거리로 몰려났던 그런 여인이었으리라.
아직도 남성이라는 성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현대, 아무리 시대가 변했어도, 페미니즘이 철지난 망토 같은 것이 되었어도. 남성이라는 성과 여성이라는 성 사이에 ‘살’이 아닌 ‘대화’는 가능한가. 그 친구의 물음을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여름의 중반, 불타는 태양의 계절이다.
강은교(시인)
[살며 사랑하며-강은교] 태양의 계절
입력 2014-08-13 0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