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님, 여기서는 이러셔도 됩니다”

입력 2014-08-12 01:25
배우들과 함께 춤을 추고, 연기를 하고, 무대 뒤 준비 과정을 체험하면서 공연의 숨겨진 뒷모습을 알게 되는 ‘관객참여형 RPG 공연-내일도 공연할 수 있을까’의 장면들. 한국공연예술센터 제공
지난 10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길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 가슴팍에 마라톤 선수처럼 번호가 적혀있는 띠를 두른 관객 100여명이 이곳에 모였다. ‘관객참여형 RPG(Role Playing Game)공연’에 참가한 이들은 입장하면 이름이 아닌 번호로 불린다. “27번 앞으로 나와. 33번 줄 맞춰.”

친절하게 자리를 안내해주는 여느 공연장의 분위기와는 다르다. 암전되자 가이드라 불리는 남성이 화면 속에 등장해 말을 건다. “여기는 2044년, 20년 전 대한민국의 모든 극장은 폐쇄됐다.”

명령조 말투 탓에 가이드에게 반기를 들었다가는 쫓겨날 것 같은 긴장감이 공연장을 감돈다. 작품은 30년 후 대한민국에서 모든 극장이 사라졌다는 발칙한 상상에서 시작된다.

“우리 공연할 수 있을까?”

작품 속에서 출연 배우들은 끊임없이 이 말을 한다. ‘소극적 시청자’인 관객들이 무대를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준비와 토론, 치열한 논쟁 등이 무대 뒤편에 자리 잡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와 종로구청이 후원한 ‘2014 마로니에 여름축제’가 마로니에 공원과 대학로예술극장, 아르코미술관 등 대학로 일대에서 16일까지 열린다.

‘관객참여형 RPG공연’은 지난해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새로운 버전으로 올해 관객들을 만나게 됐다. 이번 축제 프로그램 중 가장 빨리 매진을 기록한 인기작품 중 하나다. 체면 때문에, 혹은 쑥스럽다는 이유로 관람만 해왔던 관객들에게 숨겨있던 끼를 발산할 장을 마련해주자 10대 학생부터 40대 중년층까지 몰렸다. 친구, 가족 단위 관객도 다수 보였다.

대극장 무대 위를 비추는 팔로워(롱 핀 조명을 움직이는 스태프)가 갑작스런 정전에 공연을 이어가기 위해 애쓰는 모습, 기획 PD와 연출이 대본 수정을 놓고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 공연 시작 20분이 지나 도착한 ‘민폐 관객’이 떼쓰는 모습 등 무대 이면의 고군분투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참여 관객들은 가이드를 따라다니면서 이 상황을 직접 체험한다.

직접 배우가 돼보는 시간엔 프랑스 안무가에게 춤을 배우고 연기를 한다. 마지막 장면에선 모든 관객들이 함께 무대에 올라 춤을 춘다. 이 과정에서 극장이 어떤 곳인지, 어떤 일들이 그 안에서 일어나는지 관객들에게 속사정을 낱낱이 까발려 주겠다는 취지다. 2시간30여분의 공연이 끝나면 관객들은 하나 같이 이렇게 말한다. “공연 하나 올리기 참 어렵네.”

16일에는 실연당한 사람들이 애인과 나눈 선물을 가져와 경매 파티를 여는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기념품 카페’가 열린다. 이날 밤 8시 마로니에 공원 야외무대에서 열리는 폐막공연 ‘시민참여형 잼콘서트-당신의 악기를 가져오세요’에선 홈페이지를 통해 신청한 200여명의 시민이 각자 집에 있는 악기를 가져와 함께 연주하는 특별한 시간도 마련된다. 재즈파크 빅밴드가 협연하고 색소폰 연주자로 잘 알려진 이인관이 음악감독을 맡는다.

축제를 관통하는 콘셉트는 ‘여기서는 이러셔도 됩니다!’이다. 상상 속에서 그려봤을 법한 엉뚱한 공연과 프로그램이 한 자리에 모여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외에도 대학로 거리 곳곳에서 15분간 갑작스레 진행되는 ‘팝업시어터’(2일, 14∼15일), 현대무용단 ‘안은미컴퍼니’가 함께 하는 솔직한 성(性)이야기 ‘어른들을 위한 몸놀이공장 3355’(16∼17일) 등 실험적인 작품들이 이어진다. ‘어른들을…’은 지난 6월부터 10주간 전문 무용수와 일반인 참가자 60여명이 참여한 ‘움직임 워크숍’을 통해 준비한 작품이다.

김미나 기자 min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