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물 비리 있는 곳에 5만원권 다발 있다

입력 2014-08-09 04:41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인 새정치민주연합 중진 의원들의 입법로비 의혹과 관련해 5만원권이 담긴 것으로 추정되는 숙취해소음료 상자와 봉투가 뇌물 운반 수단으로 의심받고 있다.

철도부품 업체로부터 금품을 받은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새누리당 조현룡 의원은 1억6000만원을 모두 5만원권 현금으로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새누리당 박상은 의원과 관련한 뭉칫돈 의혹도 발단은 차량에서 발견된 5만원권 다발이었다. 과거 뇌물수수 사건에서 각종 상자에 가득 채워졌던 1만원권은 확실히 퇴장하는 상황이다.

수표는 1993년 금융실명제 실시 이후 출처·경로 추적이 가능하다는 이유로 뇌물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됐다. 자연히 현금이 인기를 끌면서 1만원권을 담은 큼지막한 온갖 상자들이 단골 범행도구로 등장했다.

사과 상자는 뇌물 상자의 대명사였다. 사과 상자에 1만원권 지폐를 꽉꽉 채우면 최대 5억원까지도 담을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1997년 수서비리 사건이었다. 당시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은 사과 상자에 담은 돈을 시중은행장과 정·관계 인사들에게 뿌렸다.

사과 상자가 '돈이 든 상자'로 낙인찍히자 다른 지역특산품 상자도 유행했다. 2005년 한국마사회 비리 사건에는 안동 간고등어와 상주 곶감 상자가 등장했다. '007 가방', 쇼핑 가방, 골프 가방 등 각종 가방도 종종 뇌물 전달도구로 애용됐다.

최근에는 5만원권이 1만원권을 밀어내고 뇌물 '대세'로 자리 잡았다. 5만원권이 2009년 6월 처음 발행되면서 같은 공간에 전보다 다섯 배 많은 돈을 담을 수 있게 됐다. 편지봉투에는 500만원, 007 가방에는 5억원을 담을 수 있다고 한다. 사과 상자에는 무려 25억원이 채워진다. 뇌물 운반수단도 갈수록 작아지는 추세다.

건설업자로부터 청탁과 함께 금품을 받은 혐의로 지난해 기소돼 2심에서 징역 1년2개월을 선고받은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경우 와인 상자에 담긴 현금 5000만원과 미화 1만 달러를 건네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새누리당 홍사덕 전 의원이 지난해 지인 사업가로부터 불법 정치자금 3000만원을 받았을 때에는 중국산 녹각 상자 등이 사용됐다.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이 은신했던 순천 송치재 별장 밀실에서도 5만원권 현금 다발로 8억3000만원이 발견됐다.

종전보다 간편한 방식으로 '검은돈'이 오가자 뇌물 사건의 증거를 포착해야 하는 검찰은 진땀을 더욱 뺄 수밖에 없게 됐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1∼5월 발행된 5만원권 5조2500억원 중 다시 은행으로 회수된 것은 27.7%인 1조4500억원에 불과했다.

유성열 기자 nukuv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