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의 가족친화적 정책을 취재하기 위해 2002년 유럽 출장을 갔었다. 당시 독일 정부 관리들은 부모 휴가 제도와 탄력적 근무 제도를 자랑거리로 내놨다. 산전후 휴가 14주에 육아휴직이 3년이나 됐다. 그것도 유급으로. “정말 좋겠네요. 우리는 임신하면 회사에서 쫓겨나는데….”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을 통역하는 이가 옮기려 해서 얼른 고개를 저었다. 정부 당국자 미팅 이후 만난 전국노동조합 관계자들은 이 제도를 마뜩찮아 했다. 이유는 부모휴가 사용자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육아휴직을 엄마가 하면 되지! 이게 무슨 배부른 소리야!” 저들이 알아듣지 못해 얼마나 다행인가. 성 역할에 대한 편견을 고스란히 드러내다니.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다 화끈거린다.
오래전 출장지에서의 에피소드가 떠오른 것은 국무회의에서 5일 의결한 ‘제1차 사회보장기본계획(2014∼2018년)’에 담긴 보육과 여성 관련 정책 때문이다. 국공립 어린이집을 늘리고, 일시보육 서비스 및 시간제 보육반을 도입하고, 아이돌봄 서비스 유형을 다양화하고, 방과후 초등돌봄 교실을 확대하고…. 육아휴직 대상을 확대하고, 시간선택제 일자리를 활성화하고…. 기업들이 사원모집 요강에 ‘군필자에 한함’이라는 단서조항을 달았던 때가 있었다. 그 시절 여성 대졸자도 원서 받아주는 회사 어렵사리 찾아 입사하고, ‘결혼·출산하면 퇴사시키겠다’는 협박에 굴하지 않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가사노동과 육아도 척척 해내던 슈퍼우먼들. 이제 손자 볼 나이가 된 그들이 가임여성이었을 때 정부가 이런 계획을 내놨다면 기립박수를 받을 만하다. 지금은? 글쎄…다.
정부는 이번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출산율이 1.19명(2013년)에서 1.3명(2018년)까지 높아질 것으로 보고 있다는데, 지나치게 낙관적인 예측이다. 가임기 여성들에게 결혼과 출산은 이제 선택이다. 아이 맡길 데 좀 더 마련해주고, 육아휴직 할 수 있게 해준다는 말에 솔깃할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으로 빚어지는 공백을 달가워할 기업은 없다. 법이 그렇다니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일 뿐이다. 그런 기업에 다니는 21세기의 알파걸들은 경력 관리와 출산 중 어느 쪽을 택할까? 이 두 가지가 어떻게 비교 대상이 되느냐고 따진다면 슈퍼우먼 세대다.
지금이야말로 적극적 고용개선조치(Affirmative Action)가 필요한 때가 아닐까 싶다. 출산으로 인한 공백기를 여성 노동자와 남성 노동자가 나눠 갖도록 조치를 취하자. 아무리 남녀평등이라지만 남성이 어떻게 임신과 출산을 하겠느냐고 눈을 부라리지는 마시길. 산전후 휴가는 여성이, 육아휴직은 남성이 쓰게 하자는 거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남성 육아휴직 이용자 수는 전체 육아휴직자의 3.3%에 불과하다. 그래서 정부는 남성의 육아휴직 활성화를 위해 10월부터 ‘아빠의 달’ 제도를 도입할 계획이란다. 육아휴직을 부모가 모두 사용하면, 두 번째 사용한 사람의 1개월 육아휴직 급여를 100%로 상향 지급하고, 최고 한도도 현재 100만원에서 150만원으로 높인다고 한다. 현재 육아휴직 급여는 월 통상임금의 40%(상한 100만원)만 지원된다.
이왕 하는 거 한번 확 바꿔보자. 엄마의 육아휴직은 무급, 아빠의 육아휴직은 유급으로. 고용평등의 논리에 위배된다고? 그래서 적극적 고용개선조치 아닌가. 육아휴직 여성들에게 “돈 받아가면서 놀아서 좋겠다”고 농반 진반으로 투덜댔던 일부 남성들에게도 나쁜 일은 아닐 듯. 이 정부의 유일한 숫자 공약인 고용률 70% 달성을 위해, 나아가 출산율을 높여 대한민국의 미래 성장동력을 확보하는 일에 큰 힘이 될 만한 아이디어가 아닐까.
김혜림 산업부 선임기자 mskim@kmib.co.kr
[내일을 열며-김혜림] 알파걸 위한 출산장려정책을
입력 2014-08-09 05:06 수정 2014-08-09 15: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