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속칭 '잘나가는' 피아니스트였다. 미국 동부지역 4대 명문 음대 중 하나인 뉴욕 맨해튼 음대에서 공부했다. 1994년에는 뉴욕 링컨센터에서, 98년에는 뉴욕 카네기홀에서 독주회를 열었다. 그해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예술의전당 리사이틀홀에서 독주회를 가졌다. 좋은 연주가가 대학교수로 이어지는 한국 음악계에서 그는 늘 꿈꾸던 교수 임용의 문턱까지 와 있었다.
현재 ㈜골든코스컴퍼니를 운영하고 있는 정은경(46) 대표 이야기다. 골든코스컴퍼니는 공연기획은 물론 음반제작 및 유통, 출판까지 손을 뻗치는 회사다.
일반인에게는 다소 낯설지만 클래식 공연계에서는 꽤나 유명하다. ‘Mr. 재즈, Miss. 클래식의 아름다운 우정의 시작’ ‘클래식-재즈 매력에 빠지다’ ‘나, 너, 그리고 아름다운 우리’ 등 굵직한 공연들을 기획했다. 대학교수 자리가 눈앞에 보였던 그는 어쩌다 공연기획사의 대표가 됐을까. 지난 6일 서울 용산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살려고 하나님하고 약속을 했거든요. 몸이 너무 아팠는데 그때 하나님께 ‘살려만 주시면 뭐든 하겠다’고 기도했어요. 그게 저를 공연기획자로 만들었네요(웃음).”
수술대 오르면서 약속
정 대표의 삶이 뒤틀리기 시작한 건 98년이다. 예술의전당 공연을 마치고 나니 아침마다 손가락이 쑤셨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몇 주가 지나도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그의 손에 ‘관절 류머티즘’ 판정을 내렸다. 의사는 “잠깐씩 피아노를 치는 건 괜찮지만 10시간씩 연습하는 건 안 된다”고 했다. 꿈은 그렇게 사라졌다.
머리 한쪽에 있던 교수의 자리는 우울증이 채웠다. 한동안은 아예 공연 보는 걸 포기했다. 지인들의 초청이 있을 때 몇 번 가긴 했지만 순수한 마음으로 공연에 집중하지 못했다. ‘내가 저 자리에 있으면 좋을 텐데’ ‘저 부분은 왜 저렇게 치지’ ‘나라면 더 잘 칠 텐데’ 등의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한없이 작아진 자신을 끌어내기 위해 잡은 것도 피아노였다. 직접 칠 순 없었지만 가르치는 건 가능했다. 99년 경기도 일산에 피아노 입시학원을 차렸다. 시작은 미약했지만 해가 지날수록 학원은 번창했다. 5년이 흐른 2004년 정 대표의 학원은 교사만 23명에 달했다.
그러나 2005년 정 대표의 삶은 다시 한 번 흔들렸다. 어느 날 가슴에 기분 나쁜 통증이 밀려왔다. 정 대표는 “크게 아프지는 않았다. 그런데 병원은 한 번 가 봐야 할 것 같았다. 묘한 기분이 영 꺼림칙해 국립암센터로 바로 갔다”고 말했다. 그의 육감은 틀리지 않았다. 진단은 유방암, 진행도는 초기였다. 의사는 간단한 절제술로 종양만 제거하면 된다고 했다.
수술은 간단하지 않았다. 첫 수술 후 이어진 조직검사에서 암 세포 전이 사실을 발견했다. 곧장 2차 수술에 들어갔다. 의사는 이번에도 많이 번진 게 아니니 조금만 더 잘라내면 된다고 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수술은 한 번 더 이어졌다. 2차 수술 후 조직검사에서도 또다시 전이된 탓이다. 결국 그녀의 가슴은 완전히 절제됐다.
“사람이 참 간사한 게 수술을 세 번이나 하게 되니까 나중에는 아예 하나님과 거래를 하게 되더라니까요. 처음에는 할 줄 아는 게 피아노니까 자선음악회를 한다고 그랬죠. 그렇게 기도하고 보니 이정도로는 살려주시지 않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하나 더 한 게 앞으로 20년 동안 먹고사는 것만 빼놓고 모두 봉사하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수술대 위에 오르면서 하나 더 약속했죠. 남들이 정말 하기 싫은 봉사를 제가 찾아 하겠다고요.”
수익과 봉사를 모두 추구
정 대표는 퇴원 후에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섰다. 하지만 피아노학원 대표로는 음악회를 열 수 없었다. 마침 예전에 만든 법인 위드뮤직이 있었다. 법무사였던 한 학부모가 선물로 만들어 준 법인이었다.
“막상 공연을 준비하려고 보니 필요한 게 많았어요. 단순히 사람들 많이 초대해서 음악만 들려주려고 했는데 할 일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직원도 몇 명 뽑고 하다 보니 공연기획사가 돼 있더군요.”
이후 정 대표는 공연기획에 매진했다. 대부분 어려운 이들을 돕기 위한 공연이었다. 처음으로 제대로 꾸민 공연은 2007년 ‘명성황후 김원정과 함께하는 아름다운 우정의 시작-암 환자 자녀 돕기 음악회’다. 당시 공연 수익금 대부분을 암 환자 자녀에게 기부했다. 그렇다고 수익을 챙기지 않은 것은 아니다. 공연 기획에 대한 대가는 확실히 받았고, 고생한 연주자들도 넉넉히 챙겨줬다. 다만 수익을 낸 이후에 다시 기부하는 일이 많아 큰 흑자를 내진 않았다.
이후로도 정 대표의 회사는 의미 있는 공연을 무대에 올리는 데 주력했다. 다문화가정 노숙인 장애인 등을 돕기 위한 음악회를 꾸준히 기획했다. 나중에는 단순히 음악공연뿐 아니라 뮤지컬과 교육프로그램 토크콘서트까지 만들어 무대 위에 올렸다. 지난해 말 회사명을 위드뮤직에서 골든코스컴퍼니로 바꾼 것도 보다 다양한 콘텐츠를 기획하는 곳임을 알리기 위함이다. 이달 정 대표는 경기도교육청과 함께 학교폭력 예방 콘서트를 연다.
얼핏 보면 최근 화제가 되는 사회적기업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정 대표는 결코 아니라고 답한다.
“저요, 돈 엄청 좋아해요. 돈 많이 벌 거예요. 봉사하는 무대에 공연을 올린 게 많을 뿐이지 다른 기획은 철저히 제대로 따져 받습니다. 수익은 수익대로 내야 공연자들 출연료도 제대로 챙겨줄 수 있고, 봉사도 더 많이 하지 않겠어요(웃음)?”
정은경 대표
△1968년 출생 △1990년 전주대 졸업 △1992년 미국 브루클린 콘서바토리(음악학교) 졸업 △1994년 미국 맨해튼음대 대학원 석사 △2007년∼ ㈔희망의소리 상임이사 △2011년∼ 고양상공회의소 상임위원
진삼열 기자 samuel@kmib.co.kr
[기독여성CEO 열전] (30) 정은경 골든코스컴퍼니 대표
입력 2014-08-11 03: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