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 칼럼] 은혜와 진리

입력 2014-08-09 03:10 수정 2014-08-09 15:47

요한복음 1장 14절은 성자 예수님을 은혜와 진리라는 단어로 완벽하게 소개했다. 그러나 성부와 성령님도 은혜와 진리라는 말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속성은 은혜와 진리이기 때문이다. 마치 생명체의 근간을 이루는 DNA가 이중 나선형 대칭구조로서 서로를 감싸면서 완벽하게 보완해주듯 은혜와 진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근본 성품의 DNA로서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삶과 공동체를 특징짓는 단어 또한 은혜와 진리여야 할 것이다. 왜 성도들의 삶 속에서 은혜는 디트리히 본회퍼가 말한 ‘값싼 은혜’가 되어버리는 것일까. 그것은 은혜만을 붙잡고 진리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에는 진리를 무시했을 때의 끔찍한 결과들이 많이 등장한다. 왜 그럴까. 이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은혜로우신 분인가를 알려주려고 진리를 먼저 가르쳐주신 것이다. 인간은 영적으로 타락해 완전히 무기력한 상태라는 진리,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 공의롭게 보응하신다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서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큰 은혜인지 알지 못한다. 따라서 은혜는 진리를 덮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드러낸다. 진리가 분명할수록 은혜도 분명히 나타난다. 은혜란 절대적인 진리의 기준을 세우신 하나님께서 그 진리의 기준을 성취하시기 위해 스스로 대속물이 되셔서 그 진리를 성취하신 것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진리를 추구하는 삶 속에서 은혜를 드러내지 않는다면 결코 진리에 이른 것이 아니다. 완전한 진리이신 그리스도 안에는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가 있기 때문이다. 참된 진리는 죄에 대한 처벌로만 끝나지 않는다. 은혜는 죄를 짓지 않는 능력을 부여해준다. 세상이 주장하는 진리는 죄에 대한 철저한 보응이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는 죄를 미워하고 이기도록 돕는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는 단지 죄를 덮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진리 안에서 살아갈 능력을 준다.

은혜가 충만할 때 사람들은 진리를 멸시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리를 사랑하고 따르고 행하게 된다. 진리가 충만할 때 사람들은 은혜 베풀기를 기뻐하고 용서와 사랑으로 허물을 덮어준다. 은혜와 진리 중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치면 내면과 공동체 안에서 심각한 갈등이 일어난다.

우리는 종종 은혜와 진리, 둘 중 한 가지만 선택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그러나 은혜와 진리 둘 다에게 ‘예’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진다. 또 은혜와 진리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는 것에게 ‘아니요’ 하지 않아도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진다.

교회 안에서 ‘은혜로 합시다’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만약 그 말 속에 진리를 포기해도 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다. 추상같은 진리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는 심령이어야 은혜가 은혜 되기 때문이다. 반면 ‘진리로 합시다’라는 말을 하면서 자신에게는 은혜만을 적용하고 타인에게 진리만을 적용하려 한다면 그 또한 참된 진리가 아니다. 흔치 않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문제이다.

만일 타인에게 은혜를 앞세워 적용하되 진리를 포기하지 않고 진리를 따라 은혜를 적용하고, 자신에게는 진리를 먼저 적용하되 은혜를 포기하지 않고 은혜 안에서 자신을 받아들인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은혜와 진리가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 지켜야 할 진리의 기준을 받아들이고 그 기준에 합당하지 못했음을 고백해야 한다. 그런 다음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 베풀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우리 자신에게 은혜가 베풀어질 경우 엄격하게 진리 앞에서 자신을 채찍질함으로써 진리를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산상수훈은 은혜로 들어가게 된 하나님 나라의 윤리이다. 은혜 받은 자는 진리의 수준을 높이고 강화시킨다. 개인이든 공동체이든 ‘은혜와 진리’ 한 쪽만 강조할 때는 틀림없이 그리스도의 임재부터 멀어진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시다.

<온누리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