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단內 시리아 난민촌 카메라 렌즈에 담는 포토저널리스트 이중덕

입력 2014-08-09 03:18
시리아 난민인 세 살짜리 아이가 전쟁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아이는 시리아 탈출 도중 발생한 교전으로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장면을 목격했다. 장난감 총을 보고 놀라는 아이의 모습은 내전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이 컸다는 것을 알게 한다. 아래는 난민촌 중앙도로 상점들. 빵집, 아이스크림 가게 등 없는게 없다. 그러나 이런 평화로운 상태가 언제까지 유지될지 불안하다. 이중덕씨 제공
난민촌에도 희망이 있다. 아침 햇살이 내리 쬐이는 순간 평화의 내일을 기대한다. 난민촌 아이들이 생선 캔과 병뚜껑, 스트로로 만든 자동자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다. 이중덕씨 제공
한낮 기온 45도를 넘긴 날씨는 밤사이 곤두박질쳤다. 새벽 미명. 텐트 주위로 불어오는 바람은 짧은 소매로 견디기엔 쌀쌀했다. 바람이 흔들어 깨웠을까. 열 살도 안 돼 보이는 어린이 서너 명이 헝클어진 머리를 긁적이며 텐트를 나왔다. 그들은 텐트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뭔가를 찾았다. 땔감을 줍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나무는 거의 없었고 빈 박스만 간간이 굴러다녔다. 어렵사리 박스를 주워 텐트로 돌아가면 어머니는 불을 피웠다. 불은 냉기가 감도는 텐트 내부를 데웠고 아침식사인 빵과 요거트를 만들었다. 어머니는 밤새 추웠는지 ‘짜이’ 차를 마셨다. 식사를 마치고 텐트 문을 열자 햇살이 쏟아진다.

포토저널리스트 이중덕(43·사진)씨가 바라본 요르단 자타리의 시리아 난민촌 아침 풍경이다. 그는 미명이 끝나고 햇살이 내리쬐는 순간을 ‘자비롭다’고 표현했다. 이씨에 따르면 시리아 난민들은 희망을 잃고 있다. 시리아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집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난민들에게 아침 햇살은 희망이다. 떠오르는 해를 보며 고향으로 돌아갈 그날을 소망한다.

최근 자타리 캠프촌 중앙도로에는 상점들이 들어섰다. 100% 시리아 난민이 운영하는 구멍가게들이다. 어린이를 위한 전자오락실부터 빵집, 아이스크림 가게, 과일상, 고깃집, 가전제품 판매점, 자전거 수리점 등 없는 게 없다. 오랜만에 맛보는 일상의 모습이었지만 난민들은 이 상태가 지속될까 두렵다. 50∼60년 전 이스라엘과의 전쟁으로 요르단으로 잠시 피란 온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상황도 비슷했다. 그들은 돌아가지 못한 채 텐트 자리에 벽돌집을 짓고 요르단 거주민이 됐다.

이씨는 시리아 난민의 삶을 고스란히 지켜본 우리시대의 증인 중 한 명이다. 4년째 지속되는 내전으로 시리아인들은 인근 레바논 요르단 터키 이집트 이라크 등지로 흩어졌다. 내전은 시리아 전체 인구 2200만명 중 300만명이 넘는 난민을 발생시켰고 900만명의 국내 실향민과 17만명이 넘는 사상자를 야기했다.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는 시리아 난민의 아픔을 잊지않기 위해 국민일보는 6일 요르단에서 활동 중인 이씨와 전화,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이씨는 최근 이슬람 금식월 라마단 이후 명절인 ‘에이드 알피트르’를 취재했다. 이 명절은 전 세계 무슬림에겐 가장 큰 절기로, 올해는 지난달 28일부터 3일간 진행됐다. 금식을 끝낸 무슬림은 이날이 되면 새 옷을 차려입고 친척을 방문해 맛있는 음식을 나눈다. 이씨는 난민들도 이 절기를 지키고 있는지 궁금했다.

“명절 분위기는 없었습니다. 8개월 전 시리아 홈스에서 탈출한 아흐마드씨는 ‘아들이 죽고 또 한 아들은 감옥에 가서 생사도 알 수 없는데 무슨 명절이냐’고 눈물을 글썽였어요.”

“생사도 모르는데 무슨 명절”

내전은 무슬림에게만 명절을 빼앗아가지 않았다. 시리아에 남아있는 기독교인들에게도 똑같은 고통이 가해졌다. 그는 “도로를 자유롭게 이용하는 게 어려워 친구도 만나지 못하는 실정”이라며 “이전에 비해 물가가 300∼400%까지 폭등해 일자리도 없어 아기 우유 살 돈도 없다”고 전했다.

이씨가 시리아와 인연을 맺은 것은 내전 발발 이전인 2005년이다. 당시 미국 부시 행정부는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고 시리아는 ‘6대 악의 축’으로 불렸다. 미국에서 포토저널리즘을 접한 후 국제적 이슈를 카메라에 담기 원했던 그는 시리아 현장으로 향했다. 어렵사리 찾은 현장은 분위기가 달랐다. 정치적 렌즈를 들이대며 외부에서 보던 시리아와는 딴판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순수하고 착했다. 한국 면적 2배 크기의 시리아는 넓은 환경에 역사적 유물이 많았다. 고대 팔미라 유적을 비롯해 11세기 치열했던 십자군 전쟁의 흔적도 남아있었다. 그는 점차 매혹당했다.

6년 동안 시리아에 살면서 전국 각지를 매년 여행하는 대장정을 시작했다. 도시와 시골 가리지 않았다. 미국 유학 시절 고대근동학을 공부했던 그는 다마스쿠스 국립박물관의 도움으로 시리아 전체 14개 국립박물관의 고고학 유물을 촬영할 수 있었다. 당시 찍은 사진 중에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유물도 있다. 4년간 이어진 내전은 세계유산급 유물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시리아 민주화의 불씨도 지켜봤다. 남부 농촌도시 다라에서는 청소년들이 정부를 비난하는 낙서를 했다. 비밀경찰들은 주동자들을 색출했고 이들 손가락의 손톱을 뽑으며 끔찍한 고문을 가했다. 그동안 숨죽여 살았던 시민들은 분연히 일어났다.

이씨는 당시를 회상했다. “카메라 들고 밖에 나가기가 힘들었어요. 시리아 정부는 시위가 자국민의 불만이 아니라 미국을 위시한 서방세계의 선동이라며 사진과 영상을 철저히 단속했거든요.” 이씨는 2011년 3월 시위가 확산되자 더 이상 현지에 머물 수 없어 두 달 뒤 요르단으로 철수했다. 당시 이씨는 두 번 다시 시리아인들을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빗나갔다. 2011년 말이 되자 난민들은 시리아를 탈출해 요르단 국경 마을로 몰려들었다.

그는 “난민 캠프에 사는 사람들보다 도시나 마을에서 요르단인과 섞여 살며 렌트비를 지불하는 난민들이 더 많다”며 “매달 지불해야 하는 200∼400달러 정도의 비싼 집값을 마련하는 게 그들의 최대 고민”이라고 했다.

그가 지켜본 난민의 삶은 처참했다. 건조한 사막 위에 임시로 쳐둔 텐트 안으로는 사막 먼지가 쉴 새 없이 불어왔고 노인과 아이들의 생명을 위협했다. 겨울에는 더 심해져 혹한과 마주쳐야 했다. 지난해 겨울엔 겨울폭풍이 불어 텐트를 무너뜨렸다. 500여개의 텐트가 물에 잠겼고 무너졌다.

그들을 위해 절망을 알린다


이씨는 취재를 위해 1주일에 세 번 난민촌을 찾는다. 그때마다 2000장 정도의 사진을 촬영한다. 난민촌에 가려면 수도 암만에서 차로 1시간 반을 운전해야 한다. 요르단의 유엔 난민촌은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지 않는다. 그는 허가서를 받고 출입한다.


“난민촌에 들어갔다고 해서 바로 촬영하지는 않습니다. 보통 캠프 내부를 4∼5㎞ 정도 걷습니다. 그리고 난민들과 만나 얘기부터 하죠. 서로 친해져야 좋은 사진이 나오거든요.”


시리아에 살았던 경험은 난민들과 친밀도를 높이는 촉매제다. 지난해 7월에는 화학무기 공격을 받은 구우타 마을 탈출 난민을 취재했다. 그는 마을에 있던 바라다강이 성경에도 나오며, 자신은 여러 번 방문한 경험이 있다고 말하자 난민들은 그제야 경계를 풀었다.


난민들은 그러나 카메라를 싫어한다. 잘못해서 자기 얼굴이 노출됐다가 시리아에 남아있던 가족이나 친지들이 박해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은 가장 쉬운 소재이자 어려운 피사체다. 카메라를 들이대면 손으로 ‘브이(V)’자 모양을 해온다. 이씨는 아이들과 함께 놀면서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만든다. 그렇게 찍은 사진이 생선 캔과 병뚜껑, 스트로로 자동차 장난감을 만든 아이들이었다.


이씨가 난민촌을 정기적으로 찾는 이유는 그들의 고난과 절망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렌즈를 통해 고통을 알리고 싶습니다. 동시에 우리의 봉사와 사랑을 통해 난민들에게 소망이 있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습니다. 난민들의 아픔을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실 겁니다.”


지난해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 목사는 난민촌에 불어 닥친 겨울폭풍 피해 현장을 둘러봤다. 그 후 ‘사랑의집 보내기’ 캠페인을 시작했다. 당시 극동방송은 신사옥 건축 캠페인을 진행 중이었는데 이를 중단하고 시리아 난민에게 ‘사랑의집 보내기’ 캠페인으로 전환했다. 이를 통해 1400채의 카라반 하우스가 선물로 전달됐다. 이씨는 이 모든 과정을 취재하면서 전 세계 언론매체에 난민 이슈를 전했다. 또 당시 아리랑TV가 방송한 ‘자타리의 눈물’에도 출연해 난민의 삶을 전하면서 시리아 난민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


이씨는 다음 달 4일부터 서울 마포구 극동방송에서 ‘시리아 난민, 1000일의 기록’ 사진전을 갖는다. “시리아 난민 문제는 한국인을 포함해 전 세계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이는 시리아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습니다. 창세기 21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난 하갈과 이스마엘의 고통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셨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때의 하나님이 현재의 시리아 난민의 울부짖는 소리를 외면하실까요?”


이씨는 사진작가로는 제임스 낙트웨이를 존경한다고 했다. “낙트웨이는 포토저널리스트는 단순히 역사를 기록하는 자가 아니라 역사를 바꾸는 자들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난민 문제가 없어질 때까지 캠프촌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충북 청주 출신인 이씨는 한국에서 대학 시절부터 취미로 사진을 시작했다. 2000년 미국으로 유학해 고대근동학과 이슬람학을 전공하면서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2004년 ‘포토저널리즘 콘퍼런스’에 참석하면서 스토리를 담은 다큐멘터리 사진에 눈을 떴다. 이후 그가 촬영한 난민 사진과 글은 ‘월드’ ‘릴리저스 헤럴드’ 등 미국 언론과 ‘코리안 크리스천 저널’, CGNTV, FEBC 매거진 등 국내 언론에도 소개됐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