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김찬희] 2014, 아무 일도 없는 해

입력 2014-08-08 03:08

강원도 평창의 하늘은 변화무쌍했다. 비가 세차게 창을 때리는가 하면 어느새 해가 났다. 바람이 거세게 불다가 이내 잠들었다. 지난달 23∼26일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최고경영자(CEO) 하계 포럼’은 역동적인 날씨 속에서 치러졌다. 포럼 주제는 ‘희망 대한민국! 어떻게 도약할 것인가’. 참가자들은 눈을 크게 뜨고 귀를 활짝 열었다. 그런데 그뿐인 듯했다. 다들 위기를 말하지만 막상 미래를 얘기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었다. 에너지 넘치는 평창 하늘과 달리 무기력해 보였다.

“뭐라도 하긴 해야죠, 정부나 기업이나. 이대로 가면 서서히 침몰할 뿐인데.” “우리 경제를 보면 마치 마비된 것 같아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식물경제가 따로 없어요.”

모두가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이 재현될까 두려워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경제를 한탄했다. 아무 일 없지만 역설적으로 많은 일이 시작되는 때가 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위기의 씨앗이 뿌려지고, 곪아가는 때가 있다. 1587년이 딱 그렇다. 중국 명(明) 만력 15년인 1587년에는 자연재해도, 외적 침입도, 정변도 없었다. 중국계 미국 역사학자인 레이황은 ‘1587, 아무 일도 없던 해’라는 저서에서 만력 15년을 ‘위기를 잉태한 해’로 봤다.

황제인 만력제(萬曆帝)는 겨우 열 살에 즉위했다. 초기 10년은 내각대학사 장거정(張居正)이 정무를 도맡았다. 그는 행정체계의 효율성을 높이고 국가 기강을 바로 잡았다. 조세와 요역을 통합해 은으로 납부하도록 하는 일조편법(一條鞭法)을 실시했다. 척계광(戚繼光)을 등용해 외침을 막고 국방 개혁에 속도를 냈다. 상공업이 크게 발달하고, 해외무역이 확대돼 은 유입이 늘면서 재정도 두둑해졌다. 이른바 ‘만력중흥(萬曆中興)’을 이뤘다.

하지만 1582년 장거정이 죽으면서 톱니바퀴는 거꾸로 돌기 시작했다. 만력제는 국가 개조라는 숙제를 방치했다. 1589년부터 정무를 내팽개치는 ‘태정(怠政)’을 했다. 상주문은 그냥 방치됐고, 고위 관직이 비어도 후임자를 임명하지 못했다.

경제는 더 심각했다. 거듭된 재정지출로 은이 부족해지면서 통화 감소, 경제활동 위축을 불러왔다.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 해군에 괴멸되면서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스페인은 식민지였던 남아메리카에서 막대한 양의 은을 채굴해 본국으로 가져왔다. 이 은으로 중국의 도자기나 차를 사 유럽시장에 비싸게 되파는 중개무역으로 이익을 챙겼다. 무적함대가 무너지자 중개무역도 함께 붕괴했다. 중국으로 들어오던 엄청난 양의 은도 뚝 끊어져버렸다.

위기 타개를 위해 만력제는 ‘광세사(鑛稅使)’라는 이름으로 환관을 각지에 파견했다. 은을 채굴하라고 보낸 것이다. 이들은 마구잡이로 약탈하고 행패를 부렸다. 거둔 은은 국고가 아닌 황제 개인금고로 들어갔다. 정치 혼란, 재정 고갈, 산업기반 붕괴, 부정부패는 멸망으로 이끄는 고속열차였다.

우리 경제는 ‘만력 15년’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경쟁자들은 미래 성장엔진을 찾아 활발하게 움직이는데 우리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고 있다. 투자도, 고용도, 인수·합병(M&A)도 수면 아래에 잠겼다. 규제개혁을 외치는 정부 발걸음은 더디다. 멈춰선 투자, 실종된 기업가 정신, 일관성 없는 정책은 식물경제로 빠져드는 지름길이다.

포럼 마지막 날, 어느 기업인이 혼잣말 하듯 말했다. “우리에겐 정주영 스타일이 아니라 파괴하고 창조하는 마크 저커버그 같은 새로운 기업가 정신이 간절합니다.”

김찬희 산업부 차장 c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