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교회 우물터 가는 길엔 잡풀이 무성했다. 우물은 井(정)자 모양의 석재 2단 높이였다. 한데 그 우물 한가운데로 죽은 오동나무 한 그루가 말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꽤 오랜 세월 우물 속에서 자라다 베인 듯했다.
우물 안을 들여다보니 지금 마셔도 될 만큼 맑은 물이 고여 있었다. 나무는 우물 벽 측면을 빠져 나와 우물 밖으로 자라다 등걸이 됐다. 신비했다.
“저쪽에 일렬로 늘어선 나무들 보이죠. 그 아래가 1899년 설립된 옛 교동교회터였습니다. 당시 감리교 선교사들은 교회를 세우면 반드시 학교도 운영했어요. 문헌에 따르면 오른쪽이 교회 건물, 왼쪽이 4년제 교육기관인 동화학교였습니다.”
지난 3일 오후 인천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연산군 적거지(謫居地) 앞. 주일 예배를 마치고 길을 안내한 교동교회 구본선(49) 목사는 해박한 한국교회사 실력을 바탕으로 교동교회 역사를 설명했다. 그는 ‘한국교회 처음 예배당’ 저자이기도 하다.
우물은 연산군 적거지 표석 바로 앞에 있었다. 하지만 표석은 적거지라 하지 않고 잠저지(潛邸地)라고 음각되어 있었다. 잠저란 임금이 되기 전 시기에 살던 곳을 말하는 데, 연산군은 이곳에서 귀양살이했으므로 잠저지가 아닌 적거지이다.
“교동 답사 오시는 분들은 연산이 마시던 우물로 압니다. 우물 안 오동나무도 연산군의 원혼이 서린 거라고 말들 하지요. 하지만 100여년 전 교회가 교인과 학생들을 위해 판 우물입니다.”
교회당과 학교터는 콩밭이 되어 있었다. 따라서 연산군 적거지 일대가 교회터였음을 알리는 유일한 표식은 우물이다.
교회터는 언덕배기였다. 779m에 이르는 교동 성곽 일부를 담 삼아 건축됐다. 지금은 겨우 밑돌만 남은 곳이 한두 군데 있을 뿐이다. 건축물은 남문 유량루 홍예(반쯤 둥글게 만든 문)만 남아 교동읍성이 있던 곳임을 알린다.
교동읍성은 조선 인조 7년(1629년)에 쌓았다. 이 성은 삼도수군통어영(三道水軍統禦營) 본진 주둔지였을 만큼 성세가 대단했다.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읍성은 폐사지처럼 변했다. 유일하게 남았던 유량루마저 1921년 폭풍우에 무너져 버린다. 홍예는 1975년 복원했다. 남왕국 유다의 멸망 때 같았다. ‘산천과 인걸이 간데없는’ 조정의 신세가 강화도 옆 교동도에까지 미친 것이다.
“저 아래 포구 보이시나요? 건너편 섬이 강화도입니다. 저 포구는 교동도 복음의 첫발을 뗀 남산포라는 곳입니다. 교회에서 1㎞ 떨어진 곳입니다. 1899년 8월 강화도 첫 교회였던 홍의교회(1896년 창립) 신자 권신일·황브르스길라(본명 황신애) 부부가 교동도 섬주민 구령을 위해 들어온 거죠.”
당시 선각자 권신일(1855∼1927)은 교동도와 그 일대 섬 선교를 결심하고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사하는 것이 우리에게 고난이 될 수도 있소. 그리고 하루 한 끼만 먹게 된다면 굶어죽지는 않을 것이요.”
부부는 유량루를 지나 읍성 연산군 적거지 옆 초가를 빌려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하루 한 끼를 먹어가며 전도에 나섰다. ‘사랑방 전도’였다. 훗날 목사가 된 권신일을 두고 미국 감리교 선교사 엘머 케이블은 본국에 보고한 선교 편지를 통해 ‘열정적인 신앙인’이라고 표현했다.
‘권신일은 이교도 사랑방에서조차 예수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 그들은 그런 얘기 듣기 싫으니 오지 말라고 했다. 권신일이 그들에게 말했다. “나는 여기에 세워질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재목을 찾고 있다. 여러분처럼 훌륭한 재목을 발견했을 때, 여러분이라면 그것을 악마의 부엌에서 불쏘시개가 되라고 버려두겠는가?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내일 다시 보자”고 말하고 다음날 다시 가서 다른 이야기를 전해주며 설득하곤 했다.’
그 교동교회는 “(우리가 방문했을 때) 교회당은 만원이었고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멍석이 마당에 펼쳐져 있었다. 세례 받을 공간이 없어 밖으로 나가야 했다”(1907년 엘머 케이블 선교보고)고 할 정도로 부흥했다. 이 해 교인이 660명이었다. 1904년 서한리(지금의 서한교회)와 인사리(인사교회)에 각각 분립 교회를 세웠음에도 차고 넘쳤다.
“열정적인 신앙인 권 목사와 ‘전도 부인’으로 불린 황브르스길라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봅니다. 두 사람은 시간과 장소, 조건을 초월해 몸을 바쳤거든요.”
황 전도부인에 대한 존스 선교사 선교보고.
‘교동 사역자의 아내(브르스길라)가 여인들에게 전도하는 것을 자주 보곤 한다. 그녀는 우물가의 여인들이 빨래하면 함께 빨래를 했다. 수가성의 주님처럼 우물가가 강대상이 되고 빨래하러 온 여인들이 그녀의 회중이 되었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을 전후로 한국교회는 위축되기 시작했다. 일제의 박해가 첫 번째 원인이었다. 교동교회 역시 쇠퇴하기 시작했다. 강화 출신 크리스천 독립운동가 이동휘 등을 중심으로 한 강화지역 독립운동 영향으로 일경의 탄압이 가혹했다.
교동에서도 네 차례 3·1 만세 시위가 있었다. 문헌과 구술에 따르면 크리스천 지식인 황인섭과 이교수라는 인물이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이 가운데 황은 사회주의자였다. 일경은 사회주의 확산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일제는 유무형의 압력을 가해 주민의 교회 출석을 막았다. 훗날 황인섭은 월북했고, 6·25전쟁이 터지자 그와 관련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이밖에도 인천·강화 지역 크리스천을 중심으로 한 우리나라 첫 해외 이민 합류, 성공회의 부흥, 가뭄과 태풍 등으로 인한 흉년 등이 교동교회 위축을 불렀다. 이 바람에 1912년 11개였던 교동지역 예배당마저 1920년 8개로 줄었다. 교인은 2300여명에서 900여명으로 떨어졌다.
“일제가 민족운동이 활발했던 강화·교동 지역 감리교회를 노골적으로 탄압했어요. 결국 교동교회는 1933년 성읍을 벗어나 2㎞ 떨어진 상룡리로 예배당을 이전해야 했습니다. 성읍 읍내리 교인이 한 사람도 없고 상룡리 주민만 출석했거든요. 편의상 옮겼습니다. 그때 교회 건물 그대로 옮겨 복원한 예배당이 기독교문화유적 반열에 오른 지금의 ‘상룡리 옛 교동교회 예배당’입니다. 남녀가 유별하도록 들어가는 문이 다른 예배당이죠.”
한때 이 교회 앞에선 온천수 ‘마라의 쓴물’이 솟아나 많은 관광객을 불러모으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박씨 일가가 손을 뗀 후 한 장로교인이 옛 예배당만을 보존·관리하고 있다.
교동교회 성쇠가 또 한 차례 두드러졌던 것은 전쟁 직후다. 분단 전 황해도 연백이 생활권이었던 탓에 전쟁 피난민이 많았고, 이때 북한을 탈출한 크리스천이 대거 몰렸다. 섬주민이 1만5000여명에 달할 정도였다. 상룡리 옛 예배당 주일예배엔 성읍 안이 아님에도 150여명이 주일성수를 했다.
그러나 이후 섬 인구 감소와 함께 교인이 급감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79년엔 일부 교인이 교동제일교회라는 이름으로 분리해 나갔다. 그럼에도 우리 하나님은 교회를 멸망하게 두지 않는다. 미련한 자의 입(잠 10:14)을 닫게 하고 겸손으로 존귀의 길잡이(잠 18:12) 삼아 분리된 두 교회가 대화합을 이뤘다. 현 교회당은 1991년 ‘하나된 교회’로 헌당됐다.
성읍 교동교회는 ‘부활’을 앞두고 있다. 지난 7월 1일 강화도와 연결된 교동대교가 개통됨으로써 섬이 육지가 된 것이다. 이 변화는 이 지역 모교회 교동교회뿐만 아니라 교동도 12개 교회에 ‘100년 만의 부흥’의 기폭제가 되고 있다.
옛 성읍이 복원 계획에 따라 새로 축성되듯 성읍교회도 ‘하나님의 전’으로서 영광이 재현되는 것이다.
강화=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
[한국의 성읍교회-강화 ‘교동교회’] 일제 박해로 쇠락의 길 100여년 만에 ‘전도 축성’
입력 2014-08-09 03: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