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오종석] 스윙보터 시대

입력 2014-08-07 02:06

“나 사실 박근혜 찍었는디….” 내년이면 팔순인 어머니가 최근 고백을 했다. 대통령 선거는 물론 국회의원, 지방선거까지 지금까지 단 한번도 호남 지역 성향을 벗어나지 못했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가 박 대통령을 찍은 것은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었다. 평생 고향 전북을 떠나지 않고 짙은 사투리를 쓰는 어머니가 갑자기 변한 이유는 무엇일까.

들어보니 이유는 간단했다. 지난 대선 직전 평소처럼 동네 노인정에 갔다. 한참 또래 친구들과 환담을 나누고 있는데, 새누리당 선거운동원이 방문했다. 그는 대뜸 “할머니들, 박근혜 후보 찍으면 매달 기초노령연금 20만원씩 받을 수 있어요. 박 후보만 찍으면 용돈이 늘어난다니깐요”라고 말했다. 어머니를 비롯해 노인정에 있던 6명의 할머니들은 귀가 솔깃했다. “진짜 그려? 그러면 찍어줘야지.” 지역정서상 민주당(새정치민주연합 전신) 문재인 후보를 당연히 찍을 생각이었던 6명의 할머니들은 모두 박근혜 후보를 찍었다고 한다. 월 9만9000원씩 받던 노령연금을 지난달 처음 20만원 받았다는 어머니는 자신의 투표 결정에 만족해하셨다.

용돈 늘어나는데 찍어줘야지

지난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터진 직후 새누리당 중진 의원을 만났다. 그는 “이제 지방선거는 끝났다”고 한탄했다. “6·4지방선거 전날이 49재 아니냐”며 한숨을 내쉬었다. 실제로 어린 학생들을 포함해 300명 가까운 생명이 눈앞에서 수장되는 모습을 보고 전 국민은 무능한 정부에 분통을 터뜨렸다. 많은 국민은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쳤다. 대통령이 밉고, 정부·여당은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선거 결과는 사실상 야당의 패배였다. 7·30재보선을 앞두고 지난 6월 21일 최전방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했다. 군 내 병영생활의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자식을 둔 부모는 물론 전 국민이 또 분노했다.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의 시신이 뒤늦게 확인되면서 정부에 대한 신뢰는 그야말로 땅에 떨어졌다. 그래도 재보선에선 집권여당이 압승을 거뒀다.

민심은 분명 정부에 분노하고 집권세력에 거부감이 많았는데 선거 결과는 왜 계속 거꾸로 나왔을까. 야당은 “이길 수 있고, 이겨야 하는 선거에서 졌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되짚어보면 야당이 ‘질 수밖에 없는 선거’였다. 지금은 스윙보터(swing voter) 시대다. 미결정 투표자, 부동층 유권자가 선거를 좌우한다. 이들은 자신의 삶에 도움을 줄 만한 후보를 찾기 위해 지지 정당을 쉽게 바꾸며, 지역 및 이념 지향적 투표 성향을 거부한다.

야당은 선거정국에서 세월호 심판론, 정부 심판론을 제기했다. 대통령과 집권여당의 무능을 질타했다. 하지만 ‘그래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주지 못했다. 거꾸로 여당이 승리한 이유는 간단했다. 지방선거를 앞두고는 “국가 혁신을 위해서도 대통령이 흔들리면 안 된다. 한번만 더 기회를 달라”가 통했다. 재보선을 앞두고는 경제 살리기에 나서겠다는 전략이 확실히 먹혀들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드라이브를 거는 ‘최경환노믹스’로 실로 오랜만에 주가가 오르고 부동산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스윙보터의 마음이 흔들렸다.

부동층, 경제·민생 중시할 뿐

7·30재보선 당시 수도권에서 여당이 압승을 거둔 것은 스윙보터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었다. 전남 순천·곡성에서 26년 만에 선거혁명을 일으킨 새누리당 이정현 의원. 그가 당선된 결정적 이유 중 하나도 ‘일꾼론’과 ‘예산폭탄’ 선거전략이었다.

최근 잇따른 선거에서 투표율이 높을수록 야당에 유리하다는 관념이 깨지고 있다. 유권자가 가장 많은 40, 50대 중 유독 스윙보터가 많다. 이들이 막판에 대거 투표장으로 향하면서 투표율을 높이고 있다는 게 여론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오종석 정치부장 js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