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이영미] 다시 세월호를 말하는 이유

입력 2014-08-07 02:53

“우리가 배 타고 놀러가라고 그랬어요? 죽으라고 그랬어요?”

“대구지하철 사고, 많은 사람이 죽었어도 누가 이런 소리 합니까?”

푸근한 인상의 파마머리 할머니는 TV카메라를 향해 고함을 쳤다. 사람 죽은 게 세월호만이더냐. 유난 좀 그만 떨어라. 이런 말이었다. 단순명쾌하고 당당한 악담이어서 잊히지가 않는다. 세월호 참사 100일 무렵이었고, 길 건너에선 유가족이 농성하고 있었다.

인간이 어떻게 저래. 처음엔 혀를 찼는데 생각해보니 맥락이 있는 발언이었다. 지난 5월 회식자리 실언으로 물러난 KBS 보도국장. 그의 말이 정확히 그 할머니 주장과 같았다. 한해 교통사고 사망자 수와 비교하면 세월호 희생자가 많은 게 아니라는 거다.

논리는 얼마든지 이어진다. 삼풍백화점 붕괴로 사람이 (세월호보다) 더 많이 죽었고, 천안함 때 나라 지키던 장병들이 더 고귀한 죽음을 맞았으며, 한강다리가 무너지고 강당 지붕이 내려앉았을 때 학생들은 더 황당하게 목숨을 잃었다. 그러니까 세월호 타령은 그만 하자. 심지어 최근 28사단 윤 일병 폭행 사망 보도에도 “나라 지키다 개죽음 당했으니 놀러가던 세월호와 다르다”는 식의 댓글이 달렸다.

세월호의 슬픔이 특별하지 않다는 것. 적어도 이 한 가지 점에서 그들은 완전히 옳다. 죽음이 삼백 개 모였다고 삼백 배 슬퍼지는 건 아니다. 삼백 개 죽음이 하나보다 더 슬프지도, 한 개의 죽음이 삼백 개보다 덜 아플 리도 없다. 절망은 숫자가 아니라 오직 깊이로만 이해되는 거다. 동의한다. 하지만 그들은 문제를 ‘비극’의 크기로 오해했다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틀렸다. 비극과 비극을 견주면 엉뚱한 질문에 도달한다. 왜 세월호의 애도가 천안함보다 더 길어야 하나. 세월호 유가족은 왜 대구지하철 유가족보다 목소리가 더 큰가. 이렇게 물어서는 답이 없다. 사고 발발 넉 달. 어째서 세월호가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있는지 결코 이해할 수가 없다.

얼마 전 출간된 알랭 드 보통 신간에는 뉴스를 “사회가 저지른 최악의 실패를 날마다 상기시키는” 것이라고 정의한 대목이 나온다. 그런 뉴스는 그만 소비하자는 뜻이었는데 내게는 대한민국 뉴스에 대한 촌철살인으로 들렸다. 지난 몇 달 반복된 뉴스야말로 바로 그가 말한 ‘최악의 실패를 날마다 상기시키는’ 소식들이었다. 세월호 사건은 2014년 한국 사회가 상상할 수 있는 극단의 실패였다. 그것도 ‘침몰·구조·범인색출·원인규명·책임추궁·대책마련’으로 이어진 연쇄 실패담이자 민·관·정치·언론·종교까지 저마다 힘을 보탠 실패의 합작극이었다.

어떤 이들이 여전히 세월호를 말한다면 이유는 비극이 아니다. 실패의 규모 때문이다. 거대한 실패의 이야기여서 세월호는 계속 되풀이돼야 할 주제인 거다. 그러므로 세상의 더 큰 비극들을 들어가며 “그만 징징대라”고 말하는 이들에게는 이렇게 대답해줘야 한다. 유가족들은 우리 사회가 저지른 실패의 크기를 감당하려 애쓰는 중이다.

왜 종교에는 죽음과 희생의 이미지가 흔한 걸까, 오랫동안 의아했다. 사랑만 있으면 좋을 텐데. 답을 알게 됐다는 말은 아니다. 그저 찜통더위에 밥 굶으며 앉아 있는 세월호 유가족의 사진을 바라보다가 인간조건을 떠올렸다. 누군가가 희생된 뒤에야, 그 희생에 돌을 던지고 모욕한 뒤에야,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한심한 존재인지 깨닫는다. 달라진다는 건 어찌나 어려운 일인지. 변화의 용기는 그렇게 각자의 바닥을 확인한 뒤에야 비로소 짜내게 된다.

유가족들은 세월호의 실타래를 풀 수 있는 희망이자 자산이다. 많은 것들이 벽에 부딪친 지금, 폭언과 막말에도 꿋꿋이 버티고 선 유가족의 존재는 힘이 될 거라 믿는다. 그들을 보며, 그들에 의지해 기운을 내볼 수 있을 거다. 다 포기한대도, 최소한 4월 16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아내야 한다. 그때까지 세월호는 여전히 유효하다.

이영미 종합편집부 차장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