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분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사랑하는 상대가 필요하셨기 때문이다. 참된 '사랑'의 절대적인 조건은 서로가 대등한 입장에서 상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였다. 그 자유가 매우 '위험'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참된 사랑을 원하시는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를 주셨고, 사람은 결국 그 자유 때문에 금단의 열매를 먹게 되었다.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
그러나 하나님처럼 자유로운 존재가 되겠다며 그것을 먹은 사람은 결국 자유가 아닌 죽음의 함정에 빠져 그 두려움에 결박되는 신세가 된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 2:14∼15)
선지자 이사야도 그것을 위해 아들이 오실 것을 예고했다.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사 61:1)
그러므로 ‘아들의 고난’은 처음부터 이미 계획되어 있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히 5:8∼10)
이스라엘 자손은 절기마다 양과 소를 잡아 제사를 드리고 속건제를 드렸으나 아들의 제사는 단번에 모든 것을 이루게 되어 있었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
그러나 혈과 육을 지니고 오신 그 아들을 위해 아버지는 계속해서 그 마음을 전하고, 줄곧 다짐하고, 격려했다. 요단강에서 ‘내 사랑하는 아들’(마 3:17)이라 하셨고, 나다나엘의 입을 통해 그것을 확인했고(요 1:49), 마귀도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수긍했으며(마 4:3), 귀신도 그것을 인정했다(마 8:29). 그리고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다시 그것을 들려주신 것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속건제물이 바쳐질 곳은 결국 예루살렘이었다. ‘평화의 성읍’이 ‘아리엘’ 즉 번제단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장차 ‘예루살렘’에 올라가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발표했을 때 베드로가 그러지 말라고 탄원하자 이번에는 그를 꾸짖으신다. 그의 연약함이 아니라 사탄의 미혹을 꾸짖은 것이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 16:23)
예수께서는 마침내 ‘다짐의 산행’을 준비하고, 아버지도 아들이 올라오게 될 곳에서 그와 만날 일을 준비하신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마 17:1)
로마 교회의 전승에는 이 산이 갈릴리 호수 남서쪽 16㎞ 지점에 있는 ‘다볼’산으로 되어 있다. AD 326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모친 헬레나가 다볼산 꼭대기에 성지를 조성했기 때문이다. 19세기에는 그리스 정교회가 이곳에 수도원을 세웠고,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산상변화 회당을 지었다. 그러나 높이 568m밖에 안 되는 이 산을 ‘높은 산’이라 하기 어렵다.
“하늘이 주의 것이요 땅도 주의 것이라 세계와 그 중에 충만한 것을 주께서 건설하셨나이다 남북을 주께서 창조하셨으니 다볼과 헤르몬이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나이다.”(시 89:11∼12)
해발 2804m인 ‘헤르몬(거룩한 산)’은 ‘하늘’을 의미하고 ‘다볼’은 ‘땅’을 의미하는 산이었다. 만년설이 덮여 있는 ‘헤르몬’의 정상은 세 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다. 상부 요단강을 거슬러 올라가 헤르몬 산자락의 바네아스 계곡에 갔던 예수께서 다시 요단강 남쪽으로 내려와 ‘다볼’산에 올랐다는 어색한 경로보다는 엿새 걸려서 ‘헤르몬’에 올랐다는 쪽이 더 어울린다.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마 17:2)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함께 있었다는 것은 의미가 크다. ‘모세’의 후계자는 ‘여호수아(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였고, ‘엘리야’의 계승자는 ‘엘리사(하나님이 구원하신다)’였다. 이스라엘 자손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여호수아와 치유, 구휼의 이적을 보여준 엘리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적 인물이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눅 9:31)
그날의 대화를 위해 하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를 보내신 것도 아주 적절한 조치였다. 모세와 엘리야는 모두 이 땅에 그들의 무덤을 남겨 놓지 않은 선지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때 베드로가 감동하여 예수께 아뢴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 17:4)
홀연히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들렸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 17:5)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두려워서 엎드려 있을 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말씀하셨다.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모세와 엘리야는 없었고, 예수만 거기 계셨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는 내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단속하셨다. 예수와 세 제자가 산에서 내려오자 기다리고 있던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다가왔고, 한 사람이 나와 엎드렸다.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고치지 못하더이다.”(마 17:15∼16)
예수께서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마 17:17)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는 낫게 되었다. 제자들이 예수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느냐고 물으니 믿음이 작은 까닭이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
글=김성일 소설가, 사진 제공=이원희 목사
[예표와 성취의 땅, 이스라엘] (13)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입력 2014-08-08 03: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