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병 사망 파문] ‘이유없는 폭력’ 뿌리깊은 악습… 판결문으로 본 軍 가혹행위

입력 2014-08-06 04:40

군내 ‘묻지마’ 폭력이 도를 넘었다. 선임병에 의해 특별한 이유 없이 이뤄지는 묻지마 폭력은 군이라는 조직 특성상 장기간·상습적으로 이뤄지는 특징을 보인다.

강원도 군부대에서 복무하던 김모(22)씨는 특별한 이유 없이 후임병들을 때리고 괴롭혔다. ‘요새 마음에 들지 않는다’ ‘네가 맷집이 좋다’ ‘놀릴 사람이 없다’는 등의 이유로 폭행과 가혹행위를 일삼았다. 물 젖은 손으로 뺨을 때리거나 전투화를 신고 허벅지를 차는 등 폭행 방법도 다양했다. 법원은 상습상해 혐의 등으로 기소된 김씨에 대해 지난해 10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피해자들과 합의했고, 제대 후 성실하게 대학생활을 하는 점 등을 고려했지만 재판부는 김씨의 죄질이 불량하다며 징역형을 선고했다.

2013년 이후 선고된 군 폭행 사건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 군 폭력은 대부분 실질적인 군 업무와 관계 없는 이유로 발생했다. 가해자들은 ‘후임이 혼자 PX에 갔다’ ‘얼굴을 보기 싫다’ ‘식사시간에 나를 안 불렀다’는 등의 이유로 후임병들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상습 폭행으로 사망한 윤모(20) 일병은 지난 4월 6일 ‘냉동식품을 쩝쩝거리며 먹는다’는 이유로 선임병들로부터 얼굴과 배에 수차례 폭행을 당한 끝에 다음날 기도폐쇄에 의한 뇌손상으로 사망했다.

전문가들은 군내 '묻지마 폭력'이 근절되지 않으면 또 다른 윤 일병 사건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의 한 육군 부대에 근무하던 김모(23)씨도 단순히 '심심하다'는 이유로 후임들을 괴롭혔다. 김씨는 2012년 10월 생활관 정신교육 시간에 '심심하다'는 이유로 후임병 조모(21)씨의 발바닥을 20초 동안 라이터불로 지졌다. 한 달 후 생활관에서 또 '심심하다'며 조씨에게 방독면을 씌우고 숨쉬는 구멍을 손으로 막았다. 김씨는 조씨가 괴로워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수십초 동안 세 차례에 걸쳐 같은 행위를 반복했다. 법원은 가혹행위를 한 혐의로 기소된 김씨에게 벌금 300만원을 선고했다.

후임병들에게 별다른 이유 없이 금품을 요구하다 거절하면 폭행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서울지방경찰청 전경 관리계 경찰관 임모(49)씨는 2010년 휴가를 다녀 온 의경이 빈손으로 왔다는 이유로 "외박 갔다 오면서 손에 아무것도 없느냐"며 머리채를 잡아당겨 폭행했다. 박모(24)씨는 수송지원병 후임에게 치킨을 사달라고 했는데 '돈이 없다'고 말했다는 이유로 나무지시봉으로 발바닥, 정강이를 마구 때렸다. 후임병을 때릴 것처럼 겁을 줘 몇 만원을 뜯어내거나 병사들에게 지급되는 하루 식비 1만5000원 중 일부를 입금하라고 했는데 이를 듣지 않자 정강이를 수십 회 때리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지켜지지 않고, 폐쇄적으로 운영되는 군 시스템이 묻지마 군대 폭력을 양산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군대 폭력 사건은 주로 간부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생활관, 병사 휴게실, 병사 이발소, 경계근무 초소 등에서 발생한다. 윤 일병이 소속된 의무중대는 대대본부와 떨어져 있어 상대적으로 간부들의 관리가 소홀했다. 2005년 김모 일병 총기난사 사건과 지난 6월 임모 병장 총기난사 사건도 고립된 전방부대의 GOP 초소 등에서 발생했다. 폐쇄된 공간에서 가해자는 폭력행위를 들킬 위험이 적고, 피해자는 직접적으로 도움을 청할 수 없어 폭력이 짧게는 수개월에서 길게 1년 이상 이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군 전문 변호사 천창수 변호사는 "학교 내 '왕따' 문제처럼 피해자들이 도움을 청할 수 없는 공간에 고립되면 쉽게 폭력이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재영 병영인권센터 사무차장은 "지휘관들이 적극적으로 군대 폭력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폭력 사건이 발생할 경우 스스로 책임지는 문화가 자리 잡아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일과시간 이후 마땅히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없는 군대 환경이 병사들의 폭력성을 키운다는 지적도 나온다. 사병들에게 일과시간 이후 개인 프라이버시와 문화생활을 보장하는 군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다. 천 변호사는 "생활관은 이름만 생활관이지 실제로는 생활이 이루어지지 않는 곳"이라며 "군대 스트레스를 적절히 해소할 공간이 없다면 군내 가혹행위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나성원 기자 na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