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행 돌풍’ 명량 영화 속 사실과 허구 알아보니…

입력 2014-08-06 04:48

세월호 참사로 멍든 국민들 가슴에 '이순신 리더십'이 통한 것일까? 영화 '명량'의 흥행 돌풍이 태풍급으로 발전했다. 한국 영화의 기존 흥행 기록을 모조리 갈아치우며 유례없는 속도로 '관객 1000만' 고지를 향해 진격하는 중이다. 영화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순신 장군이 승리를 일궈내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이 기적 같은 반전을 더욱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영화는 여러 에피소드를 동원한다. 이순신 전문가들과 함께 영화 속 사실과 허구를 구별해 보았다.

1. 전투 초반 대장船 혼자 싸웠나?

영화를 보면 전투가 시작될 때 12척의 조선 배 가운데 이순신 장군이 탄 대장선 혼자만 앞으로 나와 왜군을 상대하는 장면이 나온다. 대장선 혼자 싸우는 장면이 한참이나 계속되고, 나중에야 뒤에 머물던 배들이 전투에 가세한다.

이순신 연구자들은 전투 초반 대장선 혼자 싸운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은 “‘난중일기’를 보면 부하들이 저 멀리 뒤에서 겁에 질려 달아날 기세를 보였다는 대목이 있다”면서 “부하들은 전부 후방에 있었고 하도 말을 안 들으니까 초요기(招搖旗·대장이 장수들을 지휘하는 데 쓰던 신호용 군기)를 올려 불러냈다”고 말했다.

최근 ‘그러나 이순신이 있었다’를 발간한 김태훈씨는 “난중일기를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전율했던 장면이 바로 대장선 홀로 싸우는 부분이었다”면서 “영화가 이 부분을 잘 표현했다”고 평가했다.

2. 누군가 거북선을 방화했나?

전투가 임박한 상황에서 마지막 희망이었던 거북선이 불타고 이순신이 실성한 듯 울부짖는 장면이 있다. 실제로 누군가 거북선을 방화한 것이 맞을까? 전문가들은 “완벽한 허구”라고 입을 모은다.

김씨는 “거북선은 원균이 이끈 칠천량해전에서 모두 불에 탔다”면서 “이후에 다시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기록은 없다”고 말했다. 노 소장도 “명량해전에서 거북선이 없었다는 것은 연구자들 사이에서 일치된 견해”라며 “다만 이순신의 조카가 쓴 ‘충무공행록’에 보면 장수들에게 거북선 모양으로 함선을 꾸며서 군대의 기세를 도우라고 주문했다는 내용은 있다”고 전했다. 이순신 숙소에 자객이 드는 장면은 사실일까? 노 소장은 “후대의 기록에 당시 자객이 있었다는 얘기가 나오긴 한다. 그러나 신빙성이 좀 떨어진다”는 입장을 밝혔다.

3. 백병전을 적극 사용했나?

이순신 전문가들이 가장 고개를 갸웃거리는 장면이 백병전이다. 제장명 해군사관학교 해양연구소 충무공연구부 교수는 “영화에서는 이순신이 백병전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것처럼 나오는데, 백병전은 일본군의 주요 전술이었다”면서 “이순신이 40여회 해전을 치르면서 모두 승리한 이유도 일본군이 등선하지 못하게 한다는 원칙을 지키며 싸웠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제 교수는 영화에 등장하는 ‘충파’(상대 배에 부딪쳐 깨트리는 전술)에 대해서도“사실과 크게 다르다”며 “이순신은 일본 배와 부딪치지 않으려고 애썼고 원거리에서 화포로 공격하는 전술을 주로 썼다”고 덧붙였다. 김씨 역시 “영화의 가장 큰 허구는 백병전”이라면서 “난중일기에는 대장선 희생자가 사망 2명에 부상자 서너 명으로 나온다. 백병전이 있었을 리 없다”고 말했다.

4. 백성들이 급류에 갇힌 대장선을 꺼내주었나?

왜선을 급류로 끌어들여 싸움을 벌인 뒤 대장선은 백성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급류를 빠져나온다. 이 장면에서 객석의 박수 소리가 터져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이 장면도 상상력의 소산이다. 제 교수는 “민초들이 대장선을 끄집어냈다는 건 말도 안 되지만 후방에서 여러 지원을 하긴 했다”면서 “수군들에게 과일 등 먹을 것을 갖다 주고, 총알을 막도록 물에 적신 솜이불을 전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설명했다.

노 소장은 “전라지역 피난선이 주변에 한 300척 되었는데, 조선 수군 후방에 포진해서 왜적들이 마치 거대한 군대처럼 오인하게끔 위장전술을 펼쳤다는 기록은 많이 있다”고 말했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