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강은교] 아라홍련을 찾아서

입력 2014-08-06 02:32

가끔 우리는 답답한 일상을 살면서 이보다 좀 다르게 살 수는 없을까 하고 여행을 떠나거나 신기한 물건을 수집하거나 누군가의 삶, 또는 예술을 기웃거리거나 한다. 그날 아침도 그랬다. ‘아라홍련이 있는 그곳으로 다시 가자, 거기 연꽃잎 속에는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분명 있을 거야. 700년 만에 피었다는 아라홍련 꽃잎 속에는.’

나는 주섬주섬 등산복을 입고 배낭을 꾸렸다. ○○시에 있는 박물관으로 가기 위함이었다. 같이 가기로 한 K여사가 왔다. 나는 차에 올랐다. 이윽고 도착한 ○○시 박물관. 박물관 앞 아라홍련 시배지에는 연꽃들이 가득 피어 있었다. 이제 막 피기 시작했는지 어떤 연꽃은 아직 봉오리였다.

“700년 전 고려시대 연꽃이지요. 불교 탱화에 나오는 바로 그 연꽃이에요. 몇 년 전 성산산성을 발굴하는데, 씨앗 몇 알이 나왔지요. 우리 박물관은 최신의 기술을 이용하여 그 씨앗들을 발아시켰어요. 그리고 연대도 측정했지요. 고려시대 씨앗들이었어요. 몇 번의 실패 끝에 발아한 그 씨앗들을 이 연못을 조성하여 심었어요. 아시다시피 이 지역은 아라가야 지역이 아니에요? 그래서 아라홍련이라고 이름 지었지요. 벌써 4년째예요. 이젠 제법 연못이 연꽃으로 가득 차네요. 요즘 연꽃보다 작지만 색깔은 더 곱지요? 참, 시간 맞게 잘 오셨어요. 지금 이 시각은 연꽃이 만개하는 시각이에요.” 박물관 관계자는 설명했다.

그러자 나에게 좀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순간 그 ‘연분홍 모시적삼’ 같은 연꽃들이 고려시대 처녀들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고려시대의 시간을 밟으며 그 연분홍 처녀들의 버선발은 꽃잎 위에서 수런거리고 있었다. 그렇다. 아라홍련은 혼자 거기 피어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려시대를 거기 연못으로 데려오고 있었다. 우리는 고려시대의 여자들이 되고 있었다. 시간도 마음대로 움직이게 하는 ‘가능성’이 되고 있었다.

700년이나 숨어 있던, 꽃잎을 용암처럼 솟구쳐 올리는 화산이 되고 있었다. 또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 연분홍으로 숨어 있던 샘이 되고 있었다. 아아, 오늘밖에 모르는, 늘 절망하는 나보다, 오늘의 높은 빌딩들보다 키 큰 아라홍련의 미소. 아라홍련의 분홍 목소리가 연못으로부터 들려왔다.

‘네 가운데 있는 샘을 찾아라.’ ‘네 가운데 있는 연못을 찾으라.’ ‘거기 꽃을 심으라.’

강은교(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