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하응백] 노지홍 스토리

입력 2014-08-06 02:31

회사 일에 목맨 베이비붐 세대

1960년생. 지방 D고등학교 졸업, K대 경영학과 졸업, 육군 병장으로 전역, 졸업 후 1987년 S상사 입사. 27년 회사 생활 중 10년은 중국, 1년은 터키, 3년은 미국에서 근무. 상하이 법인장을 끝으로 2014년 퇴사. 한 여자의 남편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 이것이 내 친구 노지홍의 간단한 이력이다.

이 친구가 지난번 동창 모임에 나타났다. 술 몇 잔 하다가 대충 이런 말을 했다. “미안들 하다. 그동안 동창 모임이고 뭐고 한 번도 나타나지 못했다. 친구들이나, 뭐, 인간관계도 없었다. 가족도 제대로 돌보지 못한 것 같다. 정말 열심히 회사 일만 했다.”

이 친구의 이야기를 듣다가 나는 갑자기 마음 한구석에서 뭔가 울컥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바로 우리 시대 우리 나이 또래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 초등학교 때 80여명이 한 교실을 사용했고, 그것도 모자라 2부제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고등학교 때는 교련복을 입고 제식훈련을 했고, 대학 1학년 때는 성남에 있는 ‘문무대’에 입소해 10일간 군사훈련을 받았다. 1980년 봄을 끓어오르는 가슴으로 보냈고, 1987년의 감격도 맛보았다. 그러고는? 대개는 은퇴 시점까지 일만 했다. 1997년의 혹독한 시련도 겪었다. 그 친구의 말도 그랬다.

“우리 기업들이 본격적으로 달라진 것은 IMF 이후야. 그전에는 그냥 설렁설렁해도 돈 벌었지. 수입도 수출도 쉬웠어. 그 이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추기 위해 회사들이 피땀 흘렸지. 그런데 은퇴하고 나니 허무해.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것 같아.”

자네가 정말 아무것도 한 게 없을까? IMF 환란 이후 대한민국을 견인해나간 건 바로 기업이다. 1960년대는 정부와 엘리트 관료들이 앞장서고 국민들이 뒤따라가는 형국이었다. 월남에서, 열사의 사막에서, 각 지역 공단에서 국민들은 피땀 흘리며 일했다. 포항제철과 같은 대단한 공장을 단기간에 건설했다. 80년대까지 그런 패턴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정부는 말 그대로 관료화되어 추동력을 상실했고, 기업을 제외한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집단은 여전히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2011년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흡족하기보다는 낙제는 아닌 것 같다”고 한 말의 진의는 바로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기업에 비교하자면 겨우 낙제점이나 면할 점수였던 것이다.

은퇴 이후 누릴 자격 충분해

“이제는 문학책도 읽고 인문학 공부도 좀 하고, 친구들도 자주 만나고, 마누라와 여행도 하고 그렇게 살아야겠다. 인간답게 살아야겠다.”

54년을 사는 중에 딱 절반인 27년을 한 회사를 다녔던 친구, 그러면서도 인간답게 못 살았다고 주장하는 친구 노지홍. 사실 자네는 인간답게 살지 못한 것이 아니다. 가장 인간답게 살았다. 내가 문학책을 뒤적이며 음풍농월하고 낚시를 다니며 노닐 적에 자네는 백척간두의 기업 현장에서 젊음을 다 바쳤다. 자네의 일이 자네 자신의 삶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자네와 자네 가족과 나아가 우리 국민을 위한 일이었다. 자네와 같은 기업의 전사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는 이만큼이라도 산다. 자네가 태어난 1960년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79달러였다. 자네가 회사에 입사한 1987년은 3402달러, 그리고 퇴사하기 직전인 2013년에는 2만6205달러였다. 국민소득을 8배 높이로 견인한 데는 바로 자네와 같은 회사원들의 공이 가장 컸다.

내 친구 지홍아. 네 말대로 이제는 좀 쉬면서 돈 안 되는 책도 읽고, 친구들과 어울려 등산도 하고 낚시도 하고, 마누라와 함께 여행도 하고 그렇게 살아라. 자네는 그렇게 살 자격이 있다.

하응백 문학평론가·휴먼앤북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