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우선덕] 복날 개를 위한 제언

입력 2014-08-04 02:22

이 며칠, 무더위를 실감 또 실감했다. 입추·말복만 지나도 아침저녁 부는 바람이 다르다는 옛 말씀에 얼마 남지 않은 말복을 기다린다. 막상 ‘말복’하니 개고깃국 냄비에 들어갈 운명의 우리나라 견공들이 마음에 걸린다. 말복을 넘기면 그들의 수난이 한고비 넘는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여름 복날은 해마다 돌아오며 복날이 아니라도 소위 영양탕이란 간판의 개고기 음식점은 사시장철 영업이다.

개 애호가가 아닌 개고기 애호가들의 생각은 어떤 것일까. 어떤 것이긴 뭐가 어떤 거야. 댁은 댁이 먹는 소나 돼지고기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데? 소·돼지는 되고 개는 왜 안 되는데? 비아냥대며 발끈하는 반문이 따르기 마련이다. 다른 나라의 식문화가 그렇듯 개고기는 우리의 식문화이며 각 나라의 고유한 문화는 당연히 존중받아야 한다는 장광설이 이어진다. 값비싸소·돼지고기를 먹을 수 없던 시절 개고기는 서민의 궁여지책 단백질 공급원이었다는 발생설도 있다.

개고기가 여타 고기보다 월등히 비싼지 수십 해다. 꼭 개고기만 체질건강에 맞는 이가 있을 수 있겠지. 부득이 약으로 말이다. 그 외엔 개고기보다 값싼 소·돼지고기가 지천인데 여전히 개고기를 고집하는 건 그저 오기 같다.

굼벵이도 바퀴벌레도 달팽이도, 수십 수백 종의 채소도 다 생명이다. 그런데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며 감정을 알 수 있는 존재, 슬픔과 기쁨을 함께하고 나눌 수 있는 생명이 흔한가. 사람끼리도 어려운 감정의 나눔을 개는 한다. 사실은 소도 하고 돼지도 하고 닭도 꿩도 물고기도 다하지만 한 생명의 유지를 위해 다른 생명을 취해야 하는 생존의 세계를 죄다 논하기에 이 지면은 좁다. 요즘 선배 소설가의 수필에 공감하다가 책의 말미에서 무릎을 크게 쳤다. 생명이니 교감이니 해대서 반감 사지 말자. 개고기 논쟁은 얼마나 오래되고 진부한 설전인지. 없는 이들의 단백질 공급원 이야기일 뿐이잖은가. 여기 이 유쾌하고 진솔한 이야기로 설득이 될지 아닐지 모르겠다만….

“냉장고가 없던 시대에 살면서도 우리는 평등하게 삼복중에 시원한 콩국수 한 대접으로 단백질을 보충했다. 올여름이 기막히게 더울 것이라 해도 … 이보다 더한 것을 바란다면 과욕일 터이다. 언제부터 우리가 소고기로 양치질을 했단 말인가. 콩국 한 보시면 여름이 상쾌하다(채정운 수필집 ‘여우비’에서).”

우선덕(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