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한승주] 품위 있게 늙는다는 것

입력 2014-08-02 02:19

#첼리스트 정명화. 그는 우아했다. 단정하게 넘긴 머리, 노란색과 검은색이 어우러진 드레스. 때로는 악보를 응시하며 때론 눈을 감고 활을 켜는 그는 카리스마가 넘쳤다.

지난 27일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 알펜시아홀 무대에 선 정명화는 젊은 연주자 다섯 명과 함께 차이콥스키의 ‘플로렌스의 추억’을 연주했다. 힘과 기교가 절정에 이른 젊은 연주자들 사이에서도 그는 돋보였다. 하이힐을 신고 허리를 꼿꼿이 편 채 한 손에 가뿐하게 첼로를 든 그는 객석의 열렬한 박수를 받으며 무대를 떠났다. 현역으로 활동 중인 그는 올해 일흔한 살이다.

#보름 전쯤 인터넷상에서 화제가 됐던 ‘아우디 차주(車主)’ 이야기다. 서울 양천구 신월동, 할머니를 대신해 손수레를 끌고 가던 어린 손자가 길가에 세워져 있던 독일 자동차 아우디를 긁었다. 고가의 차량이라 수리비가 걱정되는 상황. 할머니와 손자는 울먹이고, 주변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손수레 안에는 콩나물 한 봉지와 바나나 몇 송이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때 등장한 중년의 아우디 주인 부부는 오자마자 대뜸 할머니에게 머리 숙여 사과했다. 차를 도로변에 세워 통행에 방해가 됐고, 그 때문에 손자가 부딪혀 죄송하다고.

늙음을 피할 수 없다면, 품위 있게 늙었으면 좋겠다. 일흔 살이 넘은 정명화. 보통은 일선에서 은퇴할 나이지만,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할 실력과 건강이 있어 부러웠다. 8년째 그를 가까이서 지켜봐온 지인은 정명화를 ‘정말 한결같은 사람’이라고 평했다. 무대 위에서는 물론 평소에도 흐트러짐이 없다는 것.

그는 실력과 명성을 후진을 위해 나누고 있다. 정명화·경화 자매가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 대관령국제음악제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음악학교다. 유명 연주가에게 수업을 받으려면 시간당 수십만원을 호가하는 시대, 음악학교는 재능 있는 학생을 발굴해 그 분야의 세계적인 연주가와 연결해주고 있다. 지난 10년간 세계 19개국 1400여명의 학생들이 거쳐 간 음악학교는 음악 영재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정명화는 종종 “지금이 예전보다 훨씬 더 학생을 잘 가르칠 수 있다.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이제야 알겠다”는 말을 한다. 연륜이 깊어질수록 실력은 쌓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실력과 명예와 재력을 나누는 대신 존경과 덕망을 얻었다. 무엇보다 스스로가 즐겁고 행복하다.

다시 아우디 차주 이야기로. 인터넷에 이 사연을 올린 이는 “저분들의 인성이 부러웠다. 집에 오는 내내 정말 멋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적었다. 그 부부에게 부러운 건 아우디를 타고 다닐 정도의 재력이 아니라 명품 인품이다. 거액의 수리비를 물게 될까봐 걱정하고 있는 할머니에게 먼저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인품. 우리 사회에 아우디 차주는 많지만, 그런 배려심을 가진 이들은 많지 않다.

품위 있게 늙어가는 사람들, 나이 들수록 존경받는 어른들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이를 위해선 젊은 시절부터 준비가 필요하다. 자신이 진정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일찌감치 깨닫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첫걸음이다.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종종 어떤 일을 하다가 ‘재능이 없어 포기해야겠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어떤 일을 꾸준히 하게 되는 힘은 재능이 아닌 열정이다. 그 일을 하루 종일, 아니 평생을 바쳐 할 만큼 좋아하느냐에 달려 있다.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면 잘하게 되고, 새로운 길이 생긴다. 자연스레 돈도 벌게 된다. 그리고 마음의 여유와 배려심도 생긴다.

휴가철이다. 바쁜 일상에 지친 몸과 마음을 내려놓고, 품위 있게 늙어갈 자신의 미래를 상상해 보면 어떨까.

한승주 문화부 차장 sj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