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아돌프 아이히만은 나치 독일에서 유대인 대량 학살을 담당했던 실무 책임자였다. 2차 대전 패배 후 아르헨티나로 도피해 성형수술까지 받고 숨어 살았지만 1960년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 의해 체포돼 예루살렘 법정에 세워져 62년 처형됐다. 그가 법정에서 한 진술은 독일 출신의 유대계 미국인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다. 재판 과정을 참관한 그녀는 64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보고서를 펴냈다.
보고서는 “유대인에 대한 광적인 증오, 열광적인 반유대주의, 세뇌교육 중 어느 것도 아닌” 아이히만의 정체성에 대한 ‘충격’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아내와 아이들을 아끼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죽어가는 인간의 고통 앞에서 마땅히 느껴야 할 연민보다 ‘(국가로부터) 어깨에 주어진 무거운 과업’을 수행하는 것이 한층 고상하다는 왜곡된 윤리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물론 히틀러와 괴벨스의 선동이 먹힌 결과다. 아렌트는 ‘독일 민족을 위한 운명의 전투’라는 구호에 주목했다. 세계대전의 주체는 독일이 아닌 ‘운명’이고, ‘민족’의 생사가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전쟁이 아닌 ‘투쟁’의 성격을 띤다. 히틀러는 몇 번의 선거를 이기며 정치적 승리를 통해 자신의 ‘말’을 독일인의 언어, 관념 속에 침투시킬 수 있었다. 그로 인해 독일인들이 홀로코스트를 평범한 일상에 속한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아렌트가 보고서의 결론으로 제시한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란 개념은 이제 이스라엘 국민들의 집단무의식 속에도 자리 잡은 듯하다. 징후는 타인의 고통에 무덤덤하게 대처하는 태도에서 확인된다. CNN 맥네이 기자가 고발했듯 이스라엘 사람들은 스데롯 언덕에 모여 앉아 태평하게 가자지구에 가해진 폭격을 감상했다. 고립돼 있는 팔레스타인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공격은 학살과 다를 것이 없다는 공분과 함께 세계 시민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윤리적 ‘불감증’에 대해 ‘히틀러와 다를 게 뭐냐’ 경악스러운 비난을 터뜨리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국방부는 ‘유엔학교까지 폭격하는 것은 비인도주의적’이라는 지적이 나오자 “유엔 대피소에 대한 공격은 인근에 매복돼 있는 하마스의 로켓, 영토를 노리는 수많은 땅굴 등을 파괴하기 위한 작전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지난 29일 유엔은 “전쟁에 의한 팔레스타인 측 사망자가 1118명에 달하고 이 중 243명은 어린이”라고 밝혔다. ‘자민족 생존을 위한 타민족 대량학살의 불가피성’에 근거한 히틀러 방식의 투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짧은 휴전이 있었던 지난달 26일 이스라엘 젊은이들이 수도 텔아비브에 모여 ‘미안하다’는 히브리어 모양으로 진열된 촛불에 불을 지폈다. 그들에게 “54년 전 아이히만 대신 이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를 법정에 세우라”고 요구할 순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최악의 민간인 피해를 부른 네타냐후의 오판에 대한 역사적 심판을 위해 3년 뒤 치러질 총선을 대비하라”고 충고할 수는 있다.
이스라엘과 미국은 하마스를 테러 집단으로 규정한다. 그렇다면 다음은 누가 한 말일까. “적들은 우리를 ‘테러리스트’라고 불렀다. 그러나 우리는 테러리스트가 아니었다. 자유를 위한 전사들은 무장해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투쟁이 도대체 왜 ‘테러리즘’이라는 말인가.”
하마스 지도자 이스마일 하니예가 떠오를 법도 하다. 그러나 이는 이스라엘 총리를 지낸 메나헴 베긴이 회고록 ‘저항(the Revolt)’에 쓴 글이다. 베긴이 회고하는 시절은 유대인 레지스탕스 민병대 ‘하가나’가 팔레스타인에 주둔한 영국군과 싸우던 때이다. 베긴은 78년 총리 재임 중 이집트와의 분쟁을 종식시킨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독립운동 끝에 건국을 달성하면 한때의 반군도 정규군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간단한 상식을 지적해 하마스를 우쭐하게 하고 싶은 의도는 없다. 최소한 우리 마음속에 작동하고 있는 ‘선과 악’의 선입견은 깰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나치 치하의 프랑스 레지스탕스에게 “무장투쟁 노선을 포기하라”고 조언할 순 없는 것 아닌가.
그러나 하마스도 깨달아야 할 게 있다. 이스라엘의 탄압이 없어지면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 체제로 곧바로 이동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이 그것이다. ‘아랍의 봄’이 한 차례 지나간 이집트에는 쿠데타로 군부 정권이 들어섰다. 아직도 중동의 많은 국가들이 반유대주의를 역이용해 종교와 결탁한 부패 정권을 이어가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모두 광신적인 민족주의를 버리지 않는다면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식의 폭력의 악순환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자신을 억압했던 독일 민족주의에서, 하마스는 이슬람 근본주의에서 각각 자신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되돌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유동근 외교안보국제부 기자 dkyoo@kmib.co.kr
[창-유동근] 증오와 애국 사이
입력 2014-08-02 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