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주 사이 유행이 변하는 패스트 패션(Fast fashion) 시대에 수십년이 넘은 옷이나 소품을 착용하는 이들이 있다. 출판사 홍성사 편집부 김기민(37) 과장은 아버지가 썼던 안경을 수리해 쓴다. 아버지 김수한(82·신림교회)씨가 그를 낳기 전부터 썼던 것이다. 김 과장은 “아버지 안경을 쓰고서야 비로소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된 것 같다. 이제 평생 가족을 위해 산 아버지가 보인다”고 말했다.
성공회대 총장 이정구(60) 사제는 고 유양수(1923∼2007) 전 교통부 장관이 입던 바지를 고쳐 입고 있다. 성공회대 이사였던 유 전 장관의 아내 김재화 성공회대 명예교수로부터 받았다. 이 사제는 “바지에는 장관님의 삶이 있고, 김 교수님의 학교에 대한 애정이 있다. 오래된 물건에는 오래된 사랑이 있다”고 말했다. 올드 패션(Old fashion)은 전 세대와의 소통이자 교감인 것 같다.
홍성사 김기민 과장 아버지의 안경
"40년된 안경 쓰니 아버지의 마음 보여요"
김 과장의 책상은 서울 마포구 홍성사 건물 3층 창가에 있다. 그는 취재진의 방문에 안경을 고쳐 쓰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아버지께는 안경 때문에 인터뷰하게 됐단 이야기를 아직 못했습니다." 김 과장은 약간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김 과장은 지난해 이맘때 아버지에게 안경을 물려달라고 했다. 이젠 쓰지 않지만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버지가 쓰던 것이었다. "왠지 아버지 안경을 쓰고 싶더라고요." 서울 남대문시장 안경 상가에 들고 갔다. "다들 이런 안경을 어디서 구했냐고 물어보시더군요. 아버지의 둥근 안경테를 반으로 자르고 제가 가지고 있던 안경알을 거기 맞춰 잘라달라고 했어요. 지금의 모양이 됐죠." 안경테를 자르는 데 1만원, 안경알을 다듬는 데 1만원. 수리비는 2만원이 들었다.
"올해 5월 공원에 갔다가 우리 애가 차문을 열다 옆 차에 닿았죠. 차 주인과 언성을 높이며 싸우게 됐어요. 아내와 저희 아이들 셋이 모두 보고 있었죠. 나중에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인 것 같아 후회가 되더라고요. 그때 불현듯 과거에 아버지가 동네 사람들과 주차나 물건값 시비가 붙어 싸우시던 모습이 떠올랐어요. 아버지가 그제야 이해되더군요. 그때 아버지도 우리 가족을 위해 싸웠던 거란 걸…."
그의 아버지는 잡화점을 오랫동안 운영해 왔다. "저희 아버지는 제가 어딜 가든지 제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세요. 들어가셨겠지 하고 돌아보면 늘 그 자리에 서 계세요. 지금도 주일 오후 뵙고 나올 때 지켜보세요. 그렇게 그 자리에서 저를 늘 지켜보시는 분. 하나님도 저희에게 그런 존재이시죠. 아버지 나이가 되어서야 아버지 마음을 조금 알게 되네요."(미소)
그에게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냐고 물었다. "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고 했다.
성공회대 이정구 총장의 물려받은 바지
"오래된 물건에는 오래된 사랑 있어요"
서울 구로구 성공회대 승연관 3층 끝. 이 사제의 집무실은 단출했다. 한쪽 벽에는 하얀 십자가가 달려 있었다. 그에게 그레이 톤의 바지는 잘 맞는 것 같았다. 취재진을 위해 여벌로 가져온 바지를 보여줬다.
"양복바지 열여섯 장과 상의 하나를 물려받았어요. 대부분 70년대 후반, 80년대 초반 거예요. 제가 받은 것 중 가장 오래된 게 이거예요. 38년 전 것이죠. 원단이 참 좋아요. 만져보세요."
라벨에는 제조회사명 바로몽(Baromon Co.LTD), 옷 주인의 이름 유양수(Yangsoo Yoo), 제작 연월일 1976년 7월 9일이 적혀 있었다. 지난 연말 경매에 나온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양복도 바로몽이었다.
이 사제는 올해 초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에서 김 교수로부터 옷을 전해 받았다.
"교수님은 누구에게 물려줄까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해요. 교회를 사랑하고, 학교를 사랑하시니까 사제이자 총장인 제게 옷을 주신 것 같아요. 주일 미사 때 몇 번에 걸쳐 옷을 갖고 오셨어요. 바지가 잘 맞는지 입어볼 곳이 마땅치 않아 성당 옆 수녀원에 가서 입어봤어요. 아마 그 수녀원에서 옷 갈아입은 첫 사제일 거예요."(웃음)
그는 자주 가는 학교 근처 수선집에 바지를 맡겼다. 허리 사이즈는 잘 맞았기 때문에 단만 3∼4㎝내렸다. 수선비용은 장당 1만6000원이었다.
"원단이 좋아서 제가 입은 뒤에도 누군가에게 물려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오래된 물건은 고인과의 소통, 주신 분과의 교제의 의미가 담기는 것 같아요. 아침마다 바지를 입을 때 고인과 김 교수님, 학교를 생각하게 돼요. 숙연해진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 총장은 이제 바지 살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패스트 패션 시대에 올드 패션 고집하는 사람들
입력 2014-08-02 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