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고 있는 자체로 제가 인간 말종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이 글을 쓰는 오늘 수요일은 1주일 휴가가 내일로 끝나는 시점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마음으로 낳은 민유와 온 가족이 나들이를 계획한 날입니다. 아침에 조금 늦게 일어나 휴양림에 갈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내가 민유가 열이 38도가 넘는다는 것입니다. 사팔뜨기 눈을 하고 호흡이 거칠었습니다. 우리 집에 올 때부터 워낙 까탈스러운 편이었지만 그래도 잘 컸습니다. 아이가 자주 가는 동네 소아과에 갔더니 왜 여길 왔느냐고 당장 종합병원 응급실로 가라는 것입니다. 경련이라네요. 정신과 의사가 소아경련을 제대로 본 적이 있어야지요. 그래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다소 호들갑을 떠는 아내에게 화를 냈습니다. “애가 뭐 열 한번 났다고 죽나?”
오전에 종합병원 응급실로 들어간 지 5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결국 우리 아인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혈액의 산소포화도가 기관 삽관 후로도 올라가지 않는 것을 보고 저도 당황하기 시작했으나 아내를 위해 침착성을 보였습니다.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눈 뜨고 당한다는 말이 딱입니다. 우리 아인 내 눈앞에서 몇 시간의 진행을 내게 보여주고 먼 길을 떠났습니다. 내가 뭐 하나 해준 것도 없이 다른 의사들이 열심히 하는 것을 지켜만 보면서 그대로 그를 보냈습니다. 나와 내 아내, 우리가 육신으로 낳은 두 자녀, 그리고 친척과 지인이 함께 슬퍼하고 있습니다. 독자들이 이 글을 보는 토요일엔 우리 아인 이미 화장을 마치고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을 것입니다.
아인 백일도 안 되었습니다. 우리 집에 온 지 한 달도 안 됐습니다. 저는 오늘 나들이 갈 자유분방한 옷을 입고 응급실에 갔습니다. 우린 아이를 보낼 준비가 전혀 안 돼 있습니다. 이번 휴가는 어차피 민유 때문에 어디 제대로 못 갈 거라고 생각하면서 가장 어설픈 휴가가 될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아주 특별한 휴가가 되었습니다.
사별을 경험한 사람이 갖는 여러 가지 감정을 전문 용어로 슬픔(grief)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단어가 아닌 고유한 전문 용어입니다. 그 슬픔이 극복되어가는 과정을 전문용어로 애도(mourning)라고 합니다. 애도는 비교적 순리대로 갈 수도 있고 소용돌이치며 매우 힘겹게 갈 수도 있습니다. 후자를 가리켜 병적 애도라고 합니다. 병적 애도는 평소 고인에 대해 복잡한 심경을 갖고 있었거나 그의 죽음이 매우 끔찍했거나 전혀 예상치 않은 죽음이었을 때 흔히 생기기 쉽습니다. 교과서엔 정상적인 애도 과정이 2개월 정도 걸린다고 나와 있습니다. 책에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이 얘기를 자살 유가족 모임에서 전했더니 아무도 이해를 못했습니다. 2개월에 뭐가 정리될 수 있을까요. 도대체 정상적인 애도란 게 뭐란 말인가요.
저는 머릿속에서 아이가 죽기 전을 시간 단위로, 날짜 단위로 되돌리며 어떻게 했으면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계속 생각합니다. 제 애도가 이른바 정상이라면 2개월 내에 이러한 강박은 높아지는 흐름에서 낮아지는 흐름으로 변경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확실히 2개월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진토가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시 30:8∼11)
자식 잃은 모든 이와 함께합니다. 민유야 사랑해. 정말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최의헌 <연세로뎀정신과의원>
[최의헌의 성서 청진기] 특별한 휴가
입력 2014-08-02 0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