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들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붙잡아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삼고자 했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을 확인했으나, 사람들은 ‘표적’만 본 것이다. 그러나 가버나움에서 다시 만난 그분의 말씀은 기대와 달랐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5∼56)
결국 ‘이스라엘의 임금’될 분이 아닌 것으로 알자,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떠났다. 또 이때부터 ‘가난한 자’에게 양식을 줄 ‘임금’을 기대했던 가룟 유다 역시 ‘아들의 길’을 이해하지 못하고 실망하기 시작했다.
“너희도 가려느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시자 베드로가 나서며 대답했다.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요 6:68∼69)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도 흔들리고 있음을 아셨다.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요 6:70∼71)
예수께서 ‘손만 대어도’ 병자 낫는 것을 보면서 유대인의 안식일 시비, 장로들의 비난이 계속되자 그분은 다시 이사야서의 말씀을 떠올리신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 49:6·한글개역판)
이제 ‘아버지의 뜻’은 유대와 사마리아뿐 아니라 ‘이방’과 ‘땅 끝’까지 이르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곧 이스라엘 지경을 넘어 가나안의 두로와 시돈으로 들어가신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그들과 어떤 관계도 맺지 말라고 엄히 명한 땅이었다.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신 7:2∼3)
예수께서 그곳에 간 것은 말씀을 전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확인하려는 ‘두드림’이었다. 그곳에 들어가자 한 가나안 여인이 부르짖으며 간청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들렸나이다.”(마 15:22)
예수께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시므로 제자들이 사정을 고했다.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그러나 그분의 대답은 차가웠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마 15:24)
여자가 끈질기게 간청하자 한 번 더 쌀쌀하게 대꾸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마 15:26)
그때나 지금이나 여자에게 ‘개’라고 말하는 것은 최대의 모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결국 ‘아버지의 뜻’을 읽으신 그분이 비로소 말씀하셨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믿음대로 되리라.”(마 15:28)
딸을 고침 받은 이 여인이 헬라계에 속하는 ‘수로보니게’ 출신(막 7:26)이었다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두로와 시돈을 넘어 더 넓고 먼 ‘땅 끝’까지 이르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 것이었다. 그것을 확인한 예수께서는 다시 갈릴리로 돌아와 저는 자를 걷게 하고 소경을 보게 하고 벙어리를 말하게 고쳐 주신 후 다시 한번 많은 사람을 먹이는 기적을 보여주셨다.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자는 여자와 어린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마 15:36∼38)
그 후에 다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찾아와 하늘에서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하자 예수께서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 장래 일을 말씀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마 16:4)
예수께서는 다시 제자들과 함께 분봉왕 빌립의 관할로 되어 있는 드라고닛 지역의 마가단 지경으로 올라간다. 분봉왕 빌립의 성읍 빌립보 가이사랴 인근에 요단강의 수원이 되는 바네아스 계곡이 있었다. 헬라와 가나안 여러 신의 신당들이 들어차 있는 그 아름다운 계곡에서 그분이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세례 요한, 엘리야, 또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하나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선뜻 나서며 대답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베드로의 그 대답은 그의 입을 통한 아버지의 격려이기도 했다. 그 대답에 예수께서 크게 기뻐하시며 말씀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바요나’는 요나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베드로의 아버지는 ‘요한’(요 1:42)이고, ‘요하난’(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에서 온 것이었다. 예수께서 왜 ‘요한의 아들’을 ‘요나(비둘기)의 아들’로 말씀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예수께서는 ‘사흘’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요나의 표적’을 깊이 생각하고 계셨을 것이다. 아삽의 마스길에서 ‘멧비둘기’는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있다.
“주의 멧비둘기의 생명을 들짐승에게 주지 마시며 주의 가난한 자의 목숨을 영원히 잊지 마소서.”(시 74:19)
예수께서는 그 ‘요나의 아들’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8∼19)
그것은 ‘혈육’의 베드로가 아니라 그분을 ‘메시아’ 즉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그 ‘믿음’을 가리켜 말씀한 것이었다. 그리고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 아버지의 격려를 받은 그분의 ‘중대발표’가 이어진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마 16:21)
글=김성일 소설가, 사진 제공=이원희 목사
[예표와 성취의 땅, 이스라엘] (12)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①
입력 2014-08-01 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