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언의 마지막이 비참하다. 그는 오랫동안 자신의 신도들에게 무엇을 설교해 왔을까. 진리 대신 뒤에 남은 돈뭉치를 보면서 짙은 허무를 느낀다. 종교단체와 관련된 여러 사건을 맡은 경험이 있다. 이단 교주들과 싸우고 대형 교회 목사들의 부정을 법정심판대에 올리기도 했다. 천주교 고위직 지도자의 송사도 맡았었다. 조계종 대표 승려들의 비리를 내부 고발한 말사주지를 변호하기도 했다. 포장만 다를 뿐 제단 뒤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본질은 비슷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막연한 절대자보다 눈에 보이는 우상을 요구한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었고 지금 이 시대에는 이단 교주가 예수의 자리에 슬며시 앉아 자신을 찬양하게 했다. 사람과 돈이 모이면 그 자체가 힘이 되고 교주가 힘의 화신이 됐다. 그럴 듯한 직함을 가진 사람들이 우상이 된 교주에게 허리를 굽혔다. 정치인과 장군들이 그렇고 대학교수, 법조인, 의사 등 전문가도 그 앞에서 무기력했다. 평범한 신도들은 더 말할 나위 없었다. 그들은 집단적으로 교주의 노예가 됐다.
속칭 가방끈이 짧은 교주가 명문대학 출신들을 졸개로 삼아 수족같이 부리는 것도 봤다. 교주는 관념적인 하나님보다 더 위력 있는 메시아였다. 현실에서 돈과 미래를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교주들은 두려움의 신화도 만들었다. 특별한 영적 능력이 있어 잘못 건드렸다가는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 미신이 현실에서 의외로 통하는 걸 봤다. 이단 교주의 재판을 취재 나왔던 유명 언론사의 기자가 겁을 먹었다. 조사를 하는 검사가 찜찜해하기도 했다. 여신도들은 교주를 배반하면 액운을 당한다는 주술에 걸려 있었다. 이단의 한 모습이었다.
일반 종교단체의 모습도 유사한 점이 있다. 사람들에게 절대순종의 프로그램을 입력시킨다.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기름을 부은 고귀한 자다.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면 안 된다. 잘못이 있어도 절대자가 정죄하는 것이지 인간이 비판하면 안 된다. 그런 교인들의 맹종 위에 왕이나 제사장 같이 권세를 부리는 거짓 예언자들이 있었다. 자신이 교회 돈 500억원을 주무르니 잘 지내면 좋은 게 많을 거라며 과시하는 교회 목사를 봤다. 몇 만명의 신도를 가진 나를 감히 어떻게 보느냐며 힘을 자랑하는 목사도 경험했다.
그 밑에 기생하는 믿음 없는 가짜들도 우글거렸다. 이권을 챙기기 위해서 장로가 되거나 담임목사의 비위를 맞추면서 실권 있는 간부로 행세하는 존재들도 있었다. 이런 교회는 이단의 행태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교회는 목사가 아니라 교인들을 위해 있어야 한다. 목사는 교인들의 신앙적 성장을 돕는 사람이지 신성한 존재가 아니다. 신도의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한 마리 양의 영혼을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는 목자가 나와야 한다.
변호사를 하면서 종교 제단의 이면을 더러 들여다봤다. 이단 교주들은 의외로 허약했다. 경찰관이 찾아갔을 때 구석에 숨어 벌벌 떠는 존재들이었다. 유병언 역시 벽장 속에 숨어 있었다. 구치소에서 죄수복을 입은 교주들은 돋보기를 코에 걸치고 공소장을 읽으면서 걱정하고 있었다. 강대상 위에서의 당당했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자신의 영혼이 마음대로 하늘을 여행하는 신비로운 존재로 선전한 교주도 있었다. 그 앞에서 수많은 신도들이 황홀경에 빠져 열광을 했었다. 그러나 감옥 안에서의 모습은 늙고 초라한 잡범과 다름이 없었다. 교도관 뒤에서 물주전자를 들고 얌전하게 따라가는 그의 어디에서도 제사장의 위엄은 보이지 않았다. 기성 대형 교회의 목사도 젊은 형사 앞에서 무기력했다. 기도조차 하지 않고 뇌물로 세상을 움직이려고 하는 모습도 봤다. 벌거벗은 임금님 속에 나오는 사기꾼처럼 이 시대의 거짓 예언자들은 유연한 혀로 세상을 농락한다. 노동 없이 수백억을 끌어들이기도 한다. 평신도들이 깨어 있어야 한다. 진실한 목자와 천사의 탈을 쓴 가짜 예언자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엄상익 변호사
[여의도포럼-엄상익] 우리 시대의 가짜 예언자들
입력 2014-07-29 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