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지호일] 2014년의 ‘길삼봉’

입력 2014-07-28 02:07
길삼봉(吉三峯)은 1589년 일어난 기축사화(己丑士禍)의 중심에 있었지만 이름만 있을 뿐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인물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길삼봉에 대해 ‘생몰년 미상. 1589년 정여립이 모반을 일으키자 나주에서 모반군에 참여하여… 전라도 고부·태인·남원·지리산·계룡산 등지로 다니면서 관군과 민가를 괴롭혔지만 (관군은 그를) 잡지 못했다. 가공인물이라는 설도 있다’고 했다.

사상가 정여립은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해 역모를 꾀했다는 이유로 쫓기게 되자 외딴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조정은 ‘정여립의 잔당’을 색출한다며 실존 여부도 모호한 길삼봉을 주모자로 지목했다. 남명 조식(1501∼1572) 문하의 최경영과 이발 같은 선비들이 길삼봉으로 몰리거나, 정여립과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이유로 죽어나갔다. 1000여명이 사망한 기축사화는 당시는 물론 현재까지도 조작과 진실 양론이 맞서고 있다.

길삼봉은 소설가 김훈의 ‘칼의 노래’에도 등장한다. 김훈은 소설에서 “정여립이 자살하자 길삼봉의 허깨비는 실체로 둔갑했다… (죽임을 당한) 길삼봉은 천명이 넘었으나, 길삼봉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다”고 썼다.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을 둘러싼 여러 현상과 그의 의문스러운 최후를 보면서 길삼봉을 떠올렸다. 유씨는 1991년 구속돼 4년을 복역하고 나온 뒤 20년간 은둔생활을 했다. 세월호 침몰이 없었다면 세간의 주목을 받고 사회의 공적이 되는 일도 없었을 터다. 그러나 4월의 참사 이후 대통령까지 나서 그를 원흉으로 지목했고, 검찰총장은 인천지검에 유씨 일가와의 일전을 명했다. 수사로 드러난 유씨의 죄는 막중하다. 검찰은 그를 대면하지 않고 1390억원에 달하는 횡령·배임·조세포탈 혐의를 특정했다.

유씨는 원흉으로 찍힌 걸 억울해 했다. 측근에게 “내가 들어가면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어 검찰 조사를 거부하고 도망을 택했다. 끝내 살아서는 붙잡히지 않았다. 유씨는 숱한 의문만 남긴 채 사망했지만 풍파는 여전하다. 검찰 최고의 ‘무사’ 최재경 인천지검장이 퇴진했고, 책임론은 그 윗선까지 향하고 있다. 유씨를 돕던 측근들과 자녀들은 지금도 쫓기는 신세다.

임진왜란 발발 3년 전인 기축년의 길삼봉은 당쟁에 비틀대던 조정과 흉흉한 민심 속에서 만들어졌다. 2014년의 유씨 역시 세월호 침몰로 대변되는 정부의 무능과 어수선한 사회 상황이 만들어낸 허깨비인지도 모르겠다.

지호일 차장 blue5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