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통해 소통 강조한 백남준, SNS 출현 예견했죠”

입력 2014-07-29 02:27
서울 서소문로 서울시립미술관 로비 벽면에 설치돼 있는 백남준 작품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김홍희 관장(왼쪽)과 천호선 전 쌈지길 대표. 올해 결혼 44돌을 맞은 부부는 백남준과의 만남 및 예술세계 등을 담은 서적을 나란히 발간했다. 구성찬 기자

백남준(1932∼2006)이 1984년 벌인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생중계 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한국에 방송되기까지 천호선(71) 전 쌈지길 대표의 역할이 컸다. 뉴욕 한국문화원 문정관으로 재직할 당시 미국 프랑스 독일에 생중계된 이 프로젝트를 한국에서도 방송하도록 KBS 이원홍 사장을 통해 주선했다. 이를 계기로 백남준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로 자리매김했다.

1992년 국내 첫 회고전을 가진 백남준을 학술적으로 처음 조명한 이는 김홍희(66) 서울시립미술관장이다. 1989년 캐나다 콩고디아 미술대학에서 ‘해프닝의 연장으로서의 백남준 비디오 아트’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굿모닝 미스터 백’ ‘백남준과 그의 예술’ 등 서적, ‘아르코 백남준 특별전’ ‘백남준의 비디오 광시곡’ 등 전시를 통해 백남준 전문 큐레이터로 부상했다.

천씨는 문화예술행정가로, 김 관장은 큐레이터로 백남준을 알리는 첨병역할을 했다. 두 사람은 부부다. 결혼한 지 올해 44년째.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 30주년과 자신들의 결혼 44돌을 기념해 ‘내 생의 한 획, 백남준’(천호선)과 ‘큐레이터는 작가를 먹고 산다’(김홍희)를 나란히 출간했다. 부부가 백남준에게 보내는 일종의 오마주인 셈이다.

부부는 1981년 10월 12일, 미국 전위예술의 산실인 ‘키친’ 창립 10주년 행사에서 백남준을 처음 만났다. 레코드판을 깨고 바이올린을 부수는 등 말로만 듣던 해프닝을 접하고 전율을 느꼈다고 한다. 김 관장은 레코드판 파편을 주워 백남준에게 사인을 부탁했더니 “나중에 작업실로 오라”고 했다. 이때부터 부부와 백남준의 35년간 인연이 시작됐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로 유명세를 치른 백남준은 1984년 귀국했다. 한국을 떠난 지 34년 만이었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예술은 사기다”라고 했다. 천씨는 책에서 “사기의 의미는 일반인들이 받아들인 것과 상당한 뉘앙스의 차이가 있다. 예술이란 가짜와 진짜가 구별되지 않고, 속고 속이면서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것으로, 진실을 꿰뚫어보는 눈이 필요하다는 얘기”라고 설명했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상징이 된 ‘다다익선’에 얽힌 얘기도 흥미롭다. “미술관 입구에 작품을 설치하기로 했는데 뉴욕 구겐하임처럼 사람들이 오르내리면서 볼 수 있는 나선형 통로가 아닌 거예요. 백 선생에게 사정을 얘기했더니 사례비 없이 설치해주겠다고 했어요. 각계의 도움을 받아 1986년 10월 3일, 개천절을 뜻하는 1003개의 모니터에 빛이 들어오는 순간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워요.”

천씨는 “백 선생은 아내에게 새로운 미술사적 비전을 심어 주고 그가 걸어갈 큐레이터의 길을 닦아 줬다”고 회고했다. 김 관장은 책에 백남준 관련 논문과 배형경 황인기 강애란 노상균 김차섭 이수경 최재은 등 작가 27명에 대한 글을 담았다. 오늘날 성행하는 유튜브와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등 지구촌 네트워크를 30년 전에 예견한 백남준. 그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인가.

“백 선생은 아침마다 세계 각국의 신문을 읽고 정보를 얻을 만큼 열정적이었죠. 그의 작품은 시각예술이라는 범주에 머물러 있던 미술을 공간과 시간의 결합으로 확장시켜 지구촌을 하나로 연결했지요. 상생과 화합, 문화적 이해와 소통을 평생의 신념으로 삼았던 그의 예술론이 아직도 유효하다고 봅니다. 한국미술계에 제2, 제3의 백남준이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