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100일이 그새 며칠 지났다. 승선명부에 기재되지 않은 이들이 있다지만 그 주장은 잊혔으니 그냥 아직 실종자는 10명 남았다고 하자. 잊힌다는 건 그런 것이다. 100일이 되도록 진상규명, 처벌, 재발방지의 어떤 부분도 논의가 완결되지 못하였다. 그런 채로 참사 100일째에는 추모문화제가 열렸다. 유가족과 시민 3만여명이 함께했으며 노래와 연주와 시낭송으로 고인의 넋을 기렸다. 시인 69명은 세월호 치유 시집도 묶어 유가족에게 전달했다.
이렇듯 기사 내용을 옮기는 이유는, 그렇다, 서울에 살면서도 그 자리에 있지 않은 방관자였다는 고백이다. 여기 앉아 아무리 마음 아파한들 무슨 소용인가. 그곳에서 촛불이 횃불 되게 작은 힘일지언정 보태야 옳았다는 뜻이다.
세월호. 말문을 열라치면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는 입김이 거세다. 그런 훈수에 힘입어 언제까지 세월호만 얘기할 것이냐며 양수겸장으로 비난도 적지 않다. 몇 자 쓰는 이 난도 세월호 이야기만 줄곧 할 수는 없다. 삶은 세월호 사건 하나로 이루어진 게 아니며 매일 다사다난하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는 말이야말로 정치적임을 아는 이는 안다. 그런데도 더 나아가 ‘그만해라 지겹다, 수학여행 가다가 사고로 죽었는데 왜 유난을 떠느냐’며 ‘엄마’라는 고귀한 이름을 더럽히는 이들의 저열한 막말이 기세등등하다. ‘세월호 참사는 교통사고’일 뿐이라는 정치인도 있다. 그들 부모형제자식이 세월호 참사와 똑같이 당해봐야 희생자의 입장을 알게 될 터인가. 그들 막말과 이 악담은 막상막하이다.
‘시인들이 무엇을 하였다’는 기사를 접하면 행동하지 못한 자로서 부끄럽다. 다른 시인 소설가들도 인터넷에 숨어서 한두 마디 할지는 모른다. 동시대인의 고통과 아픔을 직접 나눠 지지 않은 자로서 미안하다. 미약한 이 소리가 과연 영향력과 힘이 있겠는가 싶은 자괴감도 없지는 않다. 그렇더라도 망설이지 말고 그 자리에 갔어야 하거늘.
침묵은 금이라는 금언(金言)이 있다. 살면서 대부분 금언은 옳았는데 침묵은 가치가 좀 달라졌다. 이 시대에 침묵은 박쥐의 행위와 행색에 다름 아니다. 소설가 이전에 사람이라서, 사람으로서 침묵에 동조한 게 부끄럽고 미안하다. 나의 침묵은 개똥만도 못하다고 한다면 민들레 따뜻한 꽃 한 송이 피워낸 권정생 선생의 강아지똥이 헉! 놀라며 분개할 게다. 그 따위 침묵을 어디 감히 우리네 똥에다 비교를 해!
우선덕(소설가)
[살며 사랑하며-우선덕] 나의 침묵
입력 2014-07-28 0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