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국제결혼에 대한 시선이 너그러워졌지만 20년 전에는 그렇지 못했다. 특히 아무래도 우리보다 경제력이 처진다고 여겨지는 국가 사람과, 그것도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엄청난 주변의 반대를 각오해야 했다.
어렸을 적에는 내가 그 대상자가 될 줄 꿈에도 몰랐지만 현실은 그렇게 다가왔고 나는 주변의 편견을 이겨내 남편이랑 지금 영육의 동반자로 잘 살고 있다.
남편인 케니 선교사와의 인연은 1996년 2월쯤 내 선교 일을 도와주던 미얀마 토니 선교사의 딸 린다 자매를 통해서 왔다. 어느 날 린다 자매가 케니 선교사의 간증을 주면서 기도를 부탁했다. 간증에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아들이 없는 다른 크리스천 가정에 입양돼 사랑을 듬뿍 받고 성장했다는 이야기, 자신이 탄 차가 강둑에 떨어져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뒤 하나님께 헌신하게 됐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모세 같은 그의 생애에 감명 받아 필리핀 장신대학원 석사과정 졸업을 앞둔 그에게 선교 헌금을 보냈다.
그해 6월 19일 케니 선교사가 한국에 왔다. 내 도움을 인연으로 한국에서 공부하고 사역을 경험하고 싶어서 온 것이다. 신실하고 말씀도 잘 정립된 모습에 호감을 느꼈다. 케니 선교사는 한국에 온 뒤 어느 대형교회 영어 예배 사역을 맡았다. 하지만 그해 연말 내가 교회를 개척한 후 필리핀 노동자들을 위한 영어 예배를 시작할 때 말씀을 전할 사역자를 필요로 하자 다니던 교회를 사직하고 내 곁에 있어줬다.
그가 비자 기한이 끝나 인도로 돌아가자 우리의 관계를 지켜보던 미국 선교사님이 내게 케니 선교사를 사역뿐 아니라 인생의 동반자로 생각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기도하던 중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라는 대답을 들었다. 몇 달 후 다시 한국에 온 케니 선교사와 아침 식사를 하던 중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나눴다. 그도 같은 응답을 받았다고 한다. 함께 손을 굳게 잡았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서로의 사역을 도와주자고 굳게 맹세했다. 97년 10월 4일 국경을 초월해 영육간의 귀한 동역자로 우리는 부부가 됐다.
하나님이 주신 반려자와 살면서 마음이 안정돼 더욱 신앙생활에 매진할 수 있었다. 이제는 내 꿈이었던 본격적인 해외 선교를 펼쳐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했다. 선교를 목표로 삼을 때마다 나의 귀감은 한국에서 헌신적으로 봉사했던 미국 선교사님들이었다.
대학생 때 미국 선교사 닥터 그랍의 집에서 영어성경 공부를 하면서 선교사의 삶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보게 됐다. 주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존중하는 모습에 감명 받았다. 대학생 영성캠프 때 오신 탐 웰스 선교사가 제자훈련을 통해 우리에게 성경을 열정적으로 가르쳐주시던 모습도 아직 생생하다. 내가 신학 공부를 할 때 자기 일처럼 내 과제를 교정해 주고 도움을 준 분들의 손길이야말로 내가 이방인들에게 건네야 할 것임을 잊지 않았다.
이런 마음가짐을 갖고 있던 중 2003년 1월 초부터 한 달간 처음으로 인도 단기선교 여행을 했다. 인도 나갈랜드 출신인 남편의 조언에 힘입은 바 크다.
나갈랜드에 머무는 동안 안가미 크리스천 부흥교회에서 두 차례 주일 예배 및 여성 예배에서 말씀을 전하고 기도회를 인도했다. 선하디 선한 눈망울과 맑은 영혼의 신자들을 보고 있자니 이곳에서 헌신해야겠다는 생각이 강렬히 들었다. 참석 여성들을 위해 기도하던 중 성령의 강한 임재를 느꼈다. 참석자들도 큰 은혜와 영적 치유를 맛보았는지 “제호바 체, 제호바 체, 제호바 체(여호와를 찬양하라)”를 외치며 울부짖었다. 이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곳이 주님이 내게 가라고 명령하신 곳임을.
정리=고세욱 기자 swkoh@kmib.co.kr
[역경의 열매] 박남선 (7) 주님이 주신 인도 출신 남편과 선교지 나갈랜드
입력 2014-07-29 03: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