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남선 (6) “날 도와줄 수 있겠니” 음성에 1995년 목사안수

입력 2014-07-28 02:20
1995년 5월 16일 서울 종로구 여전도회관에서 열린 목사 임직식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기념촬영하고 있는 필자(앞줄 왼쪽 첫 번째).

1993년 우연히 신문을 보다가 ‘민족복음화운동본부’(당시 총재 신현균 목사) 여목연수원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이튿날 한 기도 모임에 갔다가 내가 부흥사 연수 과정에 대한 기도 제목을 말했는데 어떤 집사님이 감동 받고 내 학비를 대주셨다. 하나님의 이끄심이었다. 연수원에 1년간 다니면서 여자 목사님을 많이 만났다. 솔직히 나도 여자지만 ‘여자 목사들은 좀 무식하고 세련되지 못한 것 아니냐’는 선입견이 없지 않았는데 연수원에 있으면서 그것이 많이 깨졌다. 청산유수 같은 기도와 당찬 모습에 감동을 많이 받았다.

부흥사 연수원을 졸업한 뒤인 이듬해 어느 날 후배가 내게 ‘개신교 연합 신학연구원’이라는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트리니티신학대학원을 마쳤지만 국내 신대원도 접하고 싶은 생각이 없지 않았던 터에 흔쾌히 수락하고 목회학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이때 만난 지금의 영적 어머니인 송금자 목사님과 교무처장 목사님의 권유로 결국 목사 안수를 받게 됐다. 정말 세상 일 하나하나는 우연 같지만 어느 것도 하나님의 구상 속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다시 깨닫는 계기가 됐다.

95년 5월 16일 서울 종로구 여전도회관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정통 교단을 통해 목사 안수를 받았다. 내 나이 33세였다. 전날 밤 잠을 설치고 있을 무렵 “네가 날 도와줄 수 있겠니”라는 성령의 음성을 들었다. 곧바로 자리에 앉아 “주님이 저의 도움을 필요로 하신다면 얼마든지 도울게요.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절대로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라고 기도했다. 당시만 해도 신앙을 갖지 않은 어머니와 M. I. 멤버들, 담임목사님과 성도들이 목사안수식에 찾아와 축하했다. 부족한 종을 목사로 기름 부어 주신 하나님의 충성된 심부름꾼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시험도 없지 않았다. 선교단체인 국제선교회에서 사역했는데 영어만 배우고 가는 사람이 많았다. 또 함께 일하고 싶을 때 자신이 섬기는 교회로 떠나 사역자 양성에 어려움이 많았다. 은연중에 선교센터를 운영하는 나를 여자라는 이유로 리더십에 대해 문제 삼는 분위기도 감지됐다. 말씀과 기도로 양들을 직접 양육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기도회 모임 중 한 전도사가 자신의 반지를 개척 예물로 내놓으셨다. 결국 주변의 도움을 받아 추위가 기승을 부린 96년 12월 서울 도봉구 방학동의 공장 부지였던 건물에 만민선교교회(현 국제선교교회)를 개척했다.

나를 포함한 개척교회 멤버들은 ‘하루 3시간 이상 기도하기, 하루 3시간 이상 말씀 읽기, 하루 3명 이상 전도하기’란 표어를 내걸고 기도에 열을 올렸다.

교회가 있는 곳은 도깨비시장으로 불리는 지역인데 필리핀 외국인 노동자들이 특히 많았다. 국제선교회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들을 위해 영어 예배를 진행했다. 주일 오전에는 한국인 예배를, 오후엔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영어 예배를 인도했다. 이방인 신분으로 외롭고 소외돼 마음 둘 곳 없던 필리핀 등 외국인 노동자들이 소문을 듣고 몰리면서 주일에 50∼60명이 모였다. 조그만 교회는 주일에 항상 북적댔다. 더구나 교회 식구들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제대로 월급을 못 받을 경우 공장에 찾아가 해결책을 강구했고 이들이 한국인 사장과 말이 안 통할 때 통역을 해주면서 인간적 소통을 이어갔다.

교회를 개척하면서 정신질환에 걸린 자가 이곳에 와서 낫기도 하고, 운동권에 몸담은 형제가 새벽 기도회에서 방언을 받는 역사도 있었다. 개인적으로도 잊지 못할 성전이다. 교회 창립 5주년 기념일에 이곳에서 인도 출신의 케니 선교사와 결혼했으며 이는 곧 인도 나갈랜드 선교로 이어지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정리=고세욱 기자 swk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