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읍교회-고창 무장 ‘무장교회’] 동학군이 접수한 성터에 복음 꽃피다

입력 2014-07-26 02:16
일러스트= 정형기 jhk00105@hanmail.net
성읍 문에서 바라본 무장교회.
성읍 안 옛 무장교회당.
예배 직후 인사하는 김건호 목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 문이자 학교 교문이었다.”

정말 그랬다. 전북 고창군 무장면 무장교회 교인들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얘기했다. 그들이 어린 시절 다녔던 무장초등학교와 무장교회는 무장읍성 남문 진무루(鎭茂樓)를 통과해야 했다. 학교와 교회는 딱히 정문이 없었다. 성읍 주출입구 진무루가 두 곳의 문이었다. 진무루 누각에 오르면 객사를 기준으로 왼쪽엔 학교, 오른쪽엔 교회가 있었다.

무장교회 김석열(63) 장로와 김선영(62) 안수집사의 유소년과 청소년기, 또 청년기까지만 하더라도 그들은 정면 3칸 팔작지붕의 이 문을 지났다.

그곳 출신 오필록(49·충북 옥천 행복한교회) 목사의 얘기다.

“세상 사람들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초등학교 정문이라고 말했어요. 주일학교와 중고등부를 다녔던 우리에겐 ‘그와 더불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배당 문’이었어요. 지금 더욱 절절히 들리네요. 그때는 가리방(잉크 인쇄를 하는 행위를 일컫는 일본어) 긁어 주보와 성극 대본을 만들었어요. 생각하면 마음이 울렁거립니다. 진무루 돌계단을 올라 왼쪽 흙길로 들어서 교회로 향하던 때가 엊그제 같습니다.”

그 무장예배당은 1995년 2월 26일 주일, 교인들이 마지막 기념 촬영을 한 것을 끝으로 기능을 다했다. 그리고 다음 주일, 성곽 동문 쪽 지금의 ‘무장 남북로 40번지’에 번듯한 벽돌 교회를 건축하고 입당 예배를 올렸다.

이 무장교회는 3·1운동 직후인 1919년 3월 3일 설립됐다. 1928년 발간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하권에 따르면 선교사 도마리아와 전도인 이도숙 등이 점전(漸進)해 개척한 것으로 기록됐다. 그리고 선교사 이아각과 조사 배순홍 김종인 등이 시무했다. 이것이 비산비야의 고을 무장의 복음 전파 단초다. 이후 무장교회는 무장제일교회 아산남산교회 원천교회 무장중앙교회 등으로 분리 개척하며 폐군(1914년) 무장의 모교회가 됐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 문

이와 관련, 김호욱 광신대(역사신학) 교수는 “도마리아가 속한 미국 남장로회 연례 보고서 등을 분석해볼 때 1900년 초 설립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연례 보고서, 즉 선교 편지에 무장교회라고 딱 집어 지칭하진 않으나 무장교회임을 짐작케 하는 문장이 곳곳에 눈에 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지금의 무장교회가 선교사 도대선, 남대리(한국명)에 의해 설립됐다고 잘못 알려져 있는데 설립자는 도마리아이며 그들의 관계 등은 더 연구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20일, 무장읍성을 중심으로 한 무장면소재지는 길 물어볼 사람조차 다니지 않을 정도로 인적이 드물었다. 유모차에 의지한 구부정한 한 할머니가 아스팔트 차도로 느릿느릿 움직였다. 거개의 농촌 마을이 이처럼 활력을 잃어 가고 있다. 고향 교회도 그만큼 어려워지고 있다.

오전 11시 예배에 앞서 찾은 옛 무장교회당. ‘무장현 관아와 읍성 종합 정비계획’에 따라 공사가 한창이었다. 옛 교회당 터엔 폐기물이 쌓여 있었다. 2005년 9월 무렵까지만 하더라도 빈 예배당 건물이 있었다. 문화재청 사진 자료가 이를 입증해준다.

흰 페인트칠한 바로크 건축 양식의 옛 예배당은 1968년 헌당된 것으로 165㎡ 넓이의 블록벽돌 건물이었다. 그 교회가 헌당될 무렵 면 인구가 2만여명, 가구수가 500여호에 이르렀다. 무장초교 학생수는 1600여명으로 2부제 수업을 해야 했다. 지금 면 인구는 3400여명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교인도 200여명에 이르렀습니다. 분립 등이 이뤄졌는데도 말이죠. 기도 열기가 넘쳤지요. 교회가 생활의 중심이었던 때였으니까요. 저희 집은 교회 앞이었어요. 그땐 읍성 객사와 동헌 건물만 남아 있었어요. 토성에선 잡목이 자라 옛 성벽이라는 걸 짐작케 했죠.”

김석열 장로의 회고다.

동학군이 접수했던 성터의 예배당

한국의 성읍은 18세기 이후 급락한 조선의 위상과 함께 그 기능을 잃으며 멸실된다. 그리고 1910년 일제 강점기 시작과 함께 성읍 주요 건물인 동헌과 객사는 각기 면사무소와 보통학교(초등학교) 건물로 전환된다. 민족적 뿌리를 지우려는 일제 의도가 폐(廢)성읍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보통 성읍은 동헌, 내아, 객사, 질청, 향청, 작청, 옥사, 관주 등의 건물로 구성된다. 무장읍성도 그러했다. 옛 무장예배당은 ‘신동국여지승람’ 지도를 기준으로 할 때 향청 자리에 세워졌다. 무장초교가 동헌을 학교 관사로 쓰고, 면사무소가 객사 건물을 사용한 것으로 볼 때 향청 건물은 교회당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높다. 향청은 고을 양반들이 수령의 업무를 도우면서 동시에 견제하기 위한, 지금의 시·군·구 의회 기능을 위한 건물이다.

그러나 무장교회는 대개의 한국교회가 그러하듯 이러한 교회 역사가 정리되어 있지 않다. 남아 있는 몇 줄의 연혁으로는 신앙의 밑둥을 알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유일한 자료가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이다. 구술과 주보 등만 제대로 확보됐더라도 ‘역사교회’의 신앙이 견고한 성을 이룰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무장읍성은 1894년 동학혁명군 전봉준 손화중 김기범 최경선 등의 동학 접주들이 봉기 직후 이 성을 무혈 접수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꿨다. 동학농민혁명 무장기포지가 이웃 공음면이다.

동학농민혁명군의 반외세 물결 속에 세워진 성읍 안 교회. 그 복음이 어떤 경로, 어떤 방식으로 뿌리를 내렸는지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고창=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