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의 주님 영접에 대해 말하고 싶다. 이는 내 생애에서 주님이 주신 소중한 기적이라고 아직도 생각한다. 사람이 신앙을 갖게 된 게 뭐 그리 대단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완고한 아버지 어머니의 기독교 입문은 내게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특히 아버지가 세례를 받으시던 날, 나는 선교현장에서 어떤 영혼도 이끌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가졌다.
이미 얘기한 대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불교 신자셨다. 기독교는 용납 자체가 어려운 분위기였다. 고 3때 신앙을 가진 뒤 언니의 고자질로 새벽마다 몰래 성경을 읽고 찬양 테이프를 듣는 것을 아버지께 들켰다. 아버지는 “당장 성경을 치우지 않으면 불태우겠다”며 찬양 테이프가 들어 있는 녹음기를 바닥에 던져 박살냈다. 이후 나는 아버지와 대화를 단절하다시피 했다. 신학과 사역을 위해 서울에 올라온 이후에는 거의 집을 찾지 않았다.
변화는 밑에서부터 먼저 왔다. 내가 서울에 온 이후 남동생(박상규)이 뒤따라왔다. 동생 취직자리를 소개해주면서 그를 위해 전도하고 기도했다. 동생이라고 금방 변화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자라온 환경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6년 이상 보살피자 동생은 신앙을 갖게 됐다. 어머니에게는 서울에서 편지를 쓰면서 말미에 항상 성경구절을 달았다. 목사 안수를 받은 뒤 1997년 국제선교교회를 개척하자 얼음장처럼 굳어 있던 어머니 마음이 풀리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딸이 교회를 개척하며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내가 안 도우면 누가 돕겠나”라고 생각했다고 후일 얘기해 줬다. 2001년 어느 날 어머니가 평소에 왕래하던 절에 갔을 때였다. 승려가 자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서럽게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나중에 내 딸도 내가 죽으면 저렇게 슬피 울겠구나. 아무래도 같은 길을 가야 하지 않겠나’ 하고 마음먹었다고 하신다. 어머니는 승려에게 “이제 절에 그만 다니겠다”고 통보하고 교회로 발길을 돌렸다.
나중에 들으니 어머니는 내게 출세에 대한 기대를 많이 하셨다. 자녀 중 공부도 가장 많이 시키고 애정을 쏟은 내가 정작 부모의 뜻과 달리 교회에 다니니까 예수님에게 딸을 빼앗겼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지금은 “우리 딸이 하나님의 종이다”라고 많은 사람에게 자랑하신다고 한다.
아버지를 위해서는 30년간 중보기도를 끝없이 했다. 신앙이 아닌 아버지의 가족에 대한 헌신을 이해한 뒤로 아버지에 대한 노여움과 두려움을 많이 누그러뜨렸다. 서울에서 종종 전화하고 편지를 드렸다. 그때마다 넌지시 “예수를 믿으라”고 말했지만 처음에는 소귀에 경 읽기 수준이었다.
선교지에서 귀국한 어느 날 전화로 아버지에게 “언제 방문할 테니 시간 좀 내 달라”고 말했다. 아버지에게 전도지를 내밀고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영접기도를 했다. 나중에 “아버지, 한국에 오면 같이 가족예배 드려요”라고도 했다. 평소에는 관심도 안 주시던 분이 내 말에 조금씩 귀를 기울이셨다. 어머니가 다니시는 교회 권사님도 전도 초청 잔치에 아버지가 올 수 있도록 기도하셨다.
아버지는 내가 인도에 갔다 온 뒤 드린 전도 비디오를 보시더니 “우리 딸이 큰일을 하는 구나” 하며 대견해 하셨다. 기적이 드디어 고개를 내민 것이다. 2010년 6월 대구 가창교회에서 하나님은 아버지의 세례식이라는 놀라운 선물을 주셨다. 아버지가 세례식에서 신앙고백을 하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는 말씀이 실감났다. 세례받으신 아버지는 2년 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천국에 가셨다. 아버지는 생의 막바지에 주님을 영접하고 이제는 주님의 품안에서 편히 안식하고 계신다.
정리=고세욱 기자 swkoh@kmib.co.kr
[역경의 열매] 박남선 (5) 30년 중보기도에 온 가족 ‘예수님 영접’ 기적이
입력 2014-07-25 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