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구는 적막했다. 한때 실종자 가족과 자원봉사자, 취재진 등 1000여명이 몰렸던 곳이다. 이제 바다 안개 자욱한 항구를 지키는 이는 고작 30명 남짓. 그나마 대부분은 자원봉사자들이다. 방파제 난간에 가득 걸린 노란 리본들이 바닷바람에 나부꼈다. 그 너머로 안개 속을 무심히 오가는 여객선과 경비정만 어렴풋이 보였다.
24일로 참사 100일째를 맞은 전남 진도군 팽목항의 풍경은 쓸쓸했다. 아직까지 찾지 못한 실종자는 10명이다. 단원고 2학년 남현철(17)군, 박영인(16)군, 조은화(17)양, 허다윤(17)양, 황지현(17)양, 교사 고창석(40)씨, 양승진(57)씨, 일반인 승객 권재근(52)씨, 권혁규(6)군, 이영숙(51·여)씨 등 단원고 학생 5명과 교사 2명, 일반인 3명이다.
단원고 2학년 남군은 싱어송라이터를 꿈꾸던 친구 이다운(17)군의 자작곡 ‘사랑하는 그대여’의 가사를 지었다. “사랑하는 그대 오늘 하루도 참 고생했어요. 많이 힘든 그대 안아주고 싶어요”라는 가사가 마치 가족과 살아남은 친구들에게 전하는 메시지 같아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지난 5월 그룹 포맨의 신용재가 녹음해 공개했다. 작곡가인 다운군은 참사 하루 뒤인 4월 17일 시신으로 발견됐다.
영인군은 가족과 여행 다니기를 좋아했다. 어머니의 휴대전화에는 가족이 함께 찍은 사진이 가득했다. 운동도 좋아해 아버지와 함께 야구 경기를 즐겨 봤다. 평소 축구화를 갖고 싶어 했지만 미처 얻지 못한 채 사고를 당했다. 어머니는 아직 돌아오지 못한 박군을 위해 축구화 한 켤레를 사 팽목항 한쪽에 두고 아들을 기다린다.
희귀병인 신경섬유종을 앓고 있는 어머니를 모시고 산 다윤양은 가정형편이 어려워도 용돈 투정을 한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어려운 집안 사정에 수학여행을 가지 않겠다고 한사코 고집을 부렸다가 부모의 설득과 수학여행비를 모아 준 이모들 덕에 여행을 떠났다 아직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은화양도 경비가 비싸다며 수학여행을 가는 걸 주저했다고 한다. 착했던 은화양은 어머니에게 “배가 45도로 기울었어”라는 메시지만 남긴 채 엄마 품을 떠났다.
결혼 7년 만에 얻은 외동딸인 지현양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틈날 때마다 노트에 친구 얼굴이나 만화 캐릭터를 그렸다. 미술을 전공하면 어떻겠느냐는 주변의 권유에 어려운 집안 형편에 부담이 될까 고사했다. 최근 중국어에 흥미를 느껴 공부를 시작했지만 꿈을 펼치지 못했다.
고창석씨는 단원고 체육교사다. 체육교사지만 매일 정장에 넥타이를 매고 출근했다. 학생들은 단정히 머리를 세우고 교단에 서는 그를 고슴도치 머리 같다며 ‘도치쌤’이라 부르며 따랐다. 생존한 단원고 학생들은 그가 주변 학생들을 구하고 다른 학생들을 구하러 아래층에 내려갔다 변을 당했다고 전했다.
단원고 인성생활부장 양승진 교사는 매일 아침 일찍 출근해 하얀 장갑을 끼고 호루라기를 불며 학생들을 지도했다. 학창 시절 씨름선수로 활약해 체격이 좋아 교사가 된 뒤 주로 학생 생활지도를 담당했다. 학생들에게는 엄했지만 누구보다도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학교 뒷산 주말농장에 천년초를 키워 수익을 어려운 학생에게 전해주려 했다. 양 선생을 마지막으로 본 생존 학생은 그가 끝까지 구명조끼를 입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영숙씨는 본가가 있던 인천에서 제주로 짐을 옮기기 위해 세월호에 탔다가 변을 당했다. 2년 전 제주도에서 일하던 외아들을 찾아갔다가 풍광에 반해 ‘제주도에서 살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고 한다. 다행히 지난해 여름 제주의 한 호텔식당에 일자리를 얻었고 아들과 함께 살기 위해 서귀포에 방 두 개짜리 집을 얻었다. 올해 말이나 내년 초 제주도로 파견 올 아들과 함께 살기를 꿈꿨지만, 안타깝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권재근씨는 제주도에서 감귤농장을 운영하기 위해 베트남 출신 아내 한윤지(29·여)씨, 아들 혁규 군, 딸 지연(5)양과 세월호에 탔다. 가족 중 지연양만 유일하게 생존했고 윤지씨는 숨진 채 발견됐다. 권씨와 혁규군은 아직도 실종 상태다. 침몰 직전 가족들은 딸 지연양이라도 살리려 구명조끼를 입히고 등을 떠밀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태국의 한 네티즌은 이 사연을 그림에 담아 한국에 위로 메시지를 보냈다.
오전 9시쯤 팽목항 주차장에 40인승 버스 한 대가 도착했다. 실종자 가족들이 생활하는 진도체육관과 팽목항을 오가는 셔틀버스다. 내린 승객은 아무도 없었다.
기사 김명석(56)씨는 “매일 같은 구간을 쳇바퀴 돌 듯 오가지만 아무도 타지 않을 때가 많다”고 했다. 이어 “언제까지 운행할지 모르겠지만 시신을 다 찾을 때까지는 여기 있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는 곧 자원봉사자 2명을 싣고 다시 진도체육관으로 떠났다.
인적 없는 항구 너머 방파제에는 추모객들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고교 2학년생 김지혜(17)양은 방학을 맞아 부모님과 함께 광주에서 이곳을 찾았다. 20여분간 난간에 걸린 노란 리본들을 살펴보던 김양은 ‘어두운 세상에 별처럼 빛나던 너. 내 살아 가장 빛나는 너. 우리들 심장에 영원한 피돌기로 끝끝내 살아가는 아름다운 너’라고 적힌 리본 앞에서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스마트폰을 꺼내 이 문구를 찍었다.
오후 5시. 이날도 어김없이 브리핑이 열렸다. 이주영 해양수산부 장관이 가족대책본부 컨테이너를 찾았다. 브리핑에 참석한 실종자 가족은 5명뿐이었다. 이 장관은 당시까지의 수색 상황을 담담히 말했다. 가족들은 아무런 표정 없이 묵묵히 이 장관의 설명을 들었다.
“소조기도 끝나 가는데… 언제나 나오나 몰라, 이제 얼른 나와야지.”
실종자 황지현양의 어머니가 마치 딸을 타이르듯 나직이 혼잣말을 했다. 황양 어머니는 이날도 브리핑이 끝나자마자 동생과 함께 방파제로 향했다. 계단을 오르며 다리를 절뚝거렸다. 3개월 넘게 체육관에 앉아 딸의 소식을 기다리다 무릎이 상했다. 이날 어머니는 오전에 목포의 한 한방병원을 들러 진료를 받고 팽목항에 돌아와 브리핑을 들었다.
“전에도 병원에 갔었어. 그때는 약을 3일치만 받았는데 이번엔 5일치를 타왔어.” 어머니는 노란 리본을 하나씩 매만지며 방파제 길을 걸었다. 흐트러진 리본이 있으면 손수 바로잡았다. 황양 외삼촌이 그 뒤를 따랐다. 난간에 걸린 작은 종들을 하나씩 건드리며 “딸랑딸랑” 소리를 냈다. 이들은 아직 찾지 못한 실종자 10명의 이름이 적힌 깃발 앞에 멈췄다. 어머니와 외삼촌은 딸과 조카의 이름을 바라보며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조성은 기자, 진도=양민철 기자 jse13080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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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4-07-24 03: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