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장님은 정말 전쟁을 원하시나요? 그게 아니라면 전쟁을 막기 위해 무엇을 하실 건지 답변 부탁드립니다.”
1982년 11월 열 살의 미국 소녀 서맨사 스미스가 소련의 유리 안드로포프 서기장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분이다. 당시 인공위성 및 장거리 미사일 개발 경쟁을 벌이던 미국과 소련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자 서맨사가 당돌하게도 안드로포프 서기장에게 전쟁을 바라는지 직접 물어본 것이다.
“소련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어떤 일이든 하려고 합니다. 소련에는 규모가 크든 작든 간에 전쟁을 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밀을 경작하고, 무언가를 건설하고, 우주여행을 하는 그런 평화를 원합니다.” 83년 4월 안드로포프 서기장이 서맨사에게 보낸 답장의 골자다.
평화를 갈망한다는 안드로포프의 얘기는 거짓이었다. 그해 9월 1일 대한항공(KAL) 007편을 격추시켜 민간인 269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국제사회의 거센 비난에도 안드로포프는 피격 사실을 부인하다가 “KAL기가 스파이 임무 중이었다”고 말하는 등 횡설수설했다. 소련의 위상은 추락했고, 국제적으로 외톨이 신세가 됐다.
러시아 헌법의 연임제한 규정을 교묘하게 피해가면서 장기 집권의 탄탄대로에 접어든 KGB(국가보안위원회) 출신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존경하는 인물 중 한 명이 안드로포프라고 한다. 아마도 KGB 의장을 거쳐 공산당 서기장, 최고회의간부회 의장에 선출돼 7개월 만에 1인 독재체제를 확고히 구축한 점이 푸틴의 마음에 들었을 듯하다.
두 사람의 공통점이 하나 더 생겼다. 안드로포프 때의 KAL기 격추 사건처럼 말레이시아항공 MH17편 피격 사건으로 푸틴이 궁지에 빠진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친러 반군이 러시아로부터 지원받은 미사일을 쏴 말레이시아 여객기를 떨어뜨렸다는 증거들이 잇따라 제시되면서 러시아를 제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도 사건 관련자에 대한 문책이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푸틴은 우크라이나 정부의 책임이라면서 국제사회와 맞서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 안드로포프처럼 국제적 고립을 자초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여객기 추락사고로 13세의 나이에 숨진 서맨사가 지금 살아있다면 푸틴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지 않았을까. “대통령님은 왜 구차한 변명만 늘어놓으시나요? 그게 러시아를 위한 길일까요? 답변 부탁드립니다.”
김진홍 수석논설위원 jhkim@kmib.co.kr
[한마당-김진홍] 서맨사와 푸틴
입력 2014-07-24 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