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 사람’ 예수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것이 인간의 삶에 들어온 원점으로 찾아가서 그것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믿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그가 회복의 길을 찾는 방법은 ‘말씀’을 바탕으로 한 ‘기도’와 질문이었고, 그에 대한 응답은 언제나 ‘두드림’으로 얻어냈다. 그렇게 이어진 ‘두드림’의 결과로 받은 명령은 ‘이스라엘의 임금’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서 순종의 길을 가라는 것이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사 53:10)
그러나 양을 속건제물로 드릴 때의 절차는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번제물을 잡은 곳에서 속건제의 번제물을 잡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그 기름을 모두 드리되 곧 그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인 기름과 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내고 제사장은 그것을 다 제단 위에서 불살라 여호와께 화제로 드릴 것이니 이는 속건제니라.”(레 7:2∼5)
그렇게 드려짐에 순종하라는 것이었다.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더라도 사람의 모양으로 오신 분에게 그것은 너무 참혹하여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이사야는 제물로 드려지는 것에 대한 위로의 말씀도 덧붙여 놓았다.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사 53:10)
그러나 과연 한 사람이 속건제물로 드려져서 이스라엘뿐 아니라 천하 만민이 죄에서 사함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예수께서 그런 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 끔찍한 소식이 들려왔다. 그에게 세례를 주었던 요한이 참수당했다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마 14:14)
복음서가 기록해 놓은 그 ‘빈 들’의 위치에 대해서 다소 혼선이 있다. 마태와 마가는 그냥 ‘빈 들’이라 했고 요한은 ‘갈릴리 바다 건너편’이라 했으나 누가는 ‘벳새다라는 마을’이라고 적어 놓았기 때문이다. 본래 ‘고기잡이의 집’이라는 뜻을 지닌 ‘벳새다’는 갈릴리 호수 북쪽의 상부 요단강 하구에서 가버나움과 마주보고 있는 자리에 있고, 드라고닛 지역에 속한다.
마태와 베드로가 모두 그곳에 함께 있었고 특히 베드로, 안드레 형제와 빌립은 모두 벳새다 출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가에게 당시의 일을 전해 준 베드로나 그 자리에 있던 마태가 ‘벳새다’란 이름을 빼놓았을 까닭이 없다. 그런데 유대인 출신의 역사가 ‘요세푸스’는 ‘유대고대사’에서 갈릴리 호수의 북쪽과 동쪽에 두 벳새다가 있었음을 기록해 놓았다.
“헤롯 안디바는 벧아람브타를 요새화한 후에 황제의 아내 이름을 따라 율리아스라고 이름 지었다. 또 분봉왕 빌립은 게네사렛 호숫가에 위치한 벳새다 마을로 시의 면모를 갖추도록 만든 후 가이사의 딸 이름을 본떠 율리아스라고 명명했다.”(요세푸스 ‘유대고대사’ 18-2-1)
두 곳이 모두 ‘율리아스’가 되었으므로, 그에 따라 두 곳이 역시 같은 벳새다로 불리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세푸스는 다시 ‘유대전쟁사’에서 헤롯 안디바가 세운 율리아스는 가다라 지역 근처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했다.
“가다라에서 도망친 반역자들을 섬멸하라는 베스파시아누스의 명령에 따라 로마군은 인근의 아빌라, 율리아스, 베세못에서 아스팔티티스 호수에 이르는 모든 지역을 함락시켰다.”(요세푸스 ‘유대전쟁사’ 4-7-6)
그러므로 예수께서 배를 타고 건너간 ‘빈 들’은 베드로의 고향 벳새다가 아닌 ‘가다라의 벳새다’ 근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빈 들에서 날이 저물었으므로 모두 마을에 들어가 음식을 사먹게 하자고 제자들이 말씀드리자 그분이 말씀했다.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마 14:16)
제자들이 당황하여 다시 고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마 14:18)
그가 다시 ‘두드림’의 질문을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속건제물로 드려지면 천하 만민이 다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다짐이 필요했다. 이사야는 ‘그의 손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게 했다. 마가의 기록에는 백명씩, 오십명씩 앉혔다고 되어 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명이나 되었더라.”(마 14:19∼21)
여자와 어린이를 합하면 만명이 넘었다. 아버지의 확인이 떨어진 것이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마 6:45)
요세푸스의 기록대로 두 곳의 ‘벳새다’가 있어야 이 대목이 성립된다. 예수께서는 ‘가다라 지방 벳새다’의 빈 들에서 이 일을 행하시고, 다시 제자들을 재촉하여 ‘건너편 벳새다’로 먼저 건너가게 하신 것이다.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막 6:46)
그 놀라운 기적의 현장에서 도망치듯 급히 빠져나온 것은 그 이유가 있었다.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요 6:15)
그는 이제 완전한 순종의 길에 들어섰다. ‘이스라엘의 임금’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가야 할 길을 결연히 택한 것이다. 그는 먼저 배를 타고 출발한 제자들이 풍랑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바다 위를 걸어 그들에게로 갔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 위엄을 보여준 것이다(마 14:33). 그로부터 그의 힘찬 선언이 시작된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요 6:40)
그리고 다시 ‘생명의 포도주’에 ‘생명의 떡’이 추가되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요 6:48)
그것으로 살렘 왕 멜기세덱을 통해 미리 보여주신 예표가 성취된 것이다.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창 14:18)
글=김성일 소설가, 사진 제공=이원희 목사
[예표와 성취의 땅, 이스라엘] (11)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입력 2014-07-25 02:21